작성일 : 11-02-11 08:14
미황사 지게스님 -2010년 조선일보
 글쓴이 : 다경
조회 : 732  

나는 해남 미황사 지게스님입니다
땅끝 절과 緣 맺은 지 20여년…지게 지고 굴착기 부리며 황폐한 신라 古刹 되살렸다
마을과 지역과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절 되기를

해남 사람들은 달마(達磨)가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땅끝 달마산에 머물고 있다고 믿는다. 두륜산 남쪽 들에 느닷없이 치솟은 달마산, 창처럼 뾰족뾰족 솟구친 암봉들엔 누가 봐도 비범한 기운이 서려 있다. 그 바위들이 1만 부처 같아 고려 때 송나라 사람들이 경배했다는 명산이다.

남도의 금강, 달마산 품에 안긴 절이 미황사다. 1300년 신라 고찰(古刹)의 너른 마당에 서면 뒤로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으로 멀리 진도 바다가 펼쳐진다. 법당에선 은발의 중년 서양 남자가 쉼 없이 108배를 올리고 있다. 독일에서 소문을 듣고 반도 땅끝 절까지 혼자 찾아왔다. 미황사엔 한 해 10만명이 든다. 내·외국인 5000명이 묵어가는 템플스테이 명소다.

젊은 학승(學僧) 금강 스님이 미황사에 처음 온 1989년 절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 한창땐 스님 300명과 암자 열둘을 거느렸던 큰 절의 마당이 측백나무 숲에 뒤덮여 있었다. 대웅전엔 햇빛도 안 들었다. 병 든 주지가 떠나버려 절은 석 달이나 비어 있었다.

그는 은사 지운 스님을 주지로 모시고 2년을 꼬박 일했다. 측백 베어내길 몇 달, 달마산이 비로소 보였다. 무너진 축대를 쌓고, 보물 대웅전과 응진전 말고는 모두 사라진 전각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일주문에서부터 돌과 목재를 지게로 져 날랐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지게스님' 금강은 91년 서울에서 중앙승가대를 다녔다. 승가대 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94년 종단개혁 때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 범종단개혁추진위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러면서 현대에 맞는 불가(佛家)의 역할을 고민했다. 그는 "수행하는 스님은 많아도 세상사람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절은 드물더라"고 했다.

96년 그는 미황사로 돌아왔다. 1년 반, 지게 대신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전각들을 지었다. 97년엔 백양사 서옹 큰스님의 부름을 받아 3년을 모셨다. 노(老) 스님은 '참사랑' 수행운동을 말씀했다. "물질과 욕망에 매몰된 세상에서 우리 삶이 큰 위기"라며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종교가 벗겨 줘야 한다"고 했다. 금강은 그 가르침에 따라 일반인과 IMF 실직자를 위한 단기 수행프로그램을 고안해 진행했다.

백양사를 나와 선방(禪房)을 돌던 그가 2000년 미황사에 들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지로 임명돼 있었다. 그는 미황사를 세상사람들의 안식처로 만들어 보겠다고 맘먹었다. 어린이 한문학당부터 시작했다. 방학 때 일곱 밤을 재우며 개인주의·일등주의·컴퓨터·인스턴트식품에 젖은 아이들 몸과 마음을 뒤집어 줬다. 부모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2002년 조계종이 처음으로 공모한 템플스테이 사찰에도 지원했다. "누가 그 먼 곳까지 가겠느냐"는 비웃음을 받으며 큰 절들 사이에 끼여 겨우 지정을 받아냈다. 미황사는 막상 월드컵 때 외신기자와 외국 대사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절이 됐다. 그는 템플스테이를 내국인으로 확대했고, 2005년부터는 가장 성공적인 선(禪)수련 프로그램 '참사랑의 향기'를 연중 운영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세 차례에 걸쳐 미황사에 몸담았다. 해남과 미황사는 그에게 운명이다. 그는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 자락 삼산면 용전마을 농가에서 태어났다. 해남중 다닐 때 공부 잘하고 친구 많고 활달하던 보이스카우트 대원은 친한 친구들이 대도시로 진학한 뒤 방황했다.

그러던 해남고 1학년 때 선생님을 통해 접한 불교에 매료됐다. 그는 대흥사 암자에 살던 지운 스님 아래서 2년을 밥 짓고 나무하며 읍으로 통학했다. 훗날 그를 미황사로 이끈 그 은사 스님이다. 그는 졸업식 이튿날 해인사로 들어가 88년 스물둘에 비구(比丘) 계(戒)를 받았다. 홀어머니는 그제서야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접었다.

금강은 "마을이 살아야 절도 산다"고 믿는다. 2003년 절 아래 서정분교 학생이 다섯 명밖에 안 남자 폐교를 결정할 동창회가 열렸다. 그는 동창회에 나가 "학교를 되살려 보자"고 설득했다. 지니고 있던 서화를 내다 팔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모금한 돈으로 중고 버스를 사다 스쿨버스로 운행했다. 학생 유치 학부모모임도 만들고, 어린이들이 자율 운영하는 도서관도 세웠다. 3년 뒤 서정분교 학생은 60명으로 늘었다. 그 절반이 거꾸로 읍에서 통학한다.

미황사는 10년 가까이 해남 출신 고정희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에 자리를 내준다. 마을사람들이 농사지은 쌀과 과일이 공양물로 오르는 가을 괘불재(掛佛齋)도 연다. 산사음악회 무대엔 판소리를 한가락하는 동네 할아버지가 올라 팬클럽까지 생겼다. 읍내에서 전파사 하던 아저씨는 음악회 음향담당이다. 이 행사들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금강 스님은 유럽에서 불교를 동경해 찾아온 손님부터, 딸자식 혼사를 걱정하는 아주머니까지 기꺼이 차를 대접한다. 어떨 땐 하루 쉰 잔도 넘게 마셔 "손가락을 따면 녹색 물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불교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처의 '승가(僧伽)' 같은 공동체를 꿈꾼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편안해하고, 멀리서 미황사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힘이 솟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그 꿈이 막다른 땅끝에서 익어 간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303 550 689,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