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2-11 08:27
다이아몬드 보다 더 단단한- 최재천님
 글쓴이 : 다경
조회 : 584  

‘금강’보다 더 단단하고, ‘금강’보다 더 빛나는, ‘금강스님’

시사 큐비즘 2010/01/09 21:46 최재천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자아, 수행승려들이여, 너희에게 말하겠다. 여러 가지 사상은 지나가는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수행을 완성하라."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이라며 시대 흐름으로 번지고 있는 팔리어 경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멍하게 방심하는 일 없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이루어야 할 것을 실현하라. 게을리 하지 마라.”
대승경전에 의하건 팔리어 경전에 의하건,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 무상함을 깨닫는 일과 끊임없이 수행하는 일,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고, 부처님 말씀대로 이 땅에 회향하기 위해서는 게을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떻게 부지런히 실천할지를 두고 불교계에서 여러 개혁 논의가 한창입니다. 새로운 결사논의도 있고, 새로운 대승불교논의도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불교의 세속화 혹은 정치운동화를 기반으로 불국토 건설을 꿈꾸는 이들도 있는 듯합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이 모두는 종교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요, 불교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한국 불교의 위기, 승가 중심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불교계의 거센 노력들입니다.

 
                                           
바로 여기,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달마산 미황사가 있습니다. 미황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금강스님이 있습니다. 산빛과 달빛과 노을빛에 젖어 서 계신 금강처럼 단단하고, 금강처럼 빛나는 스님입니다. 그렇다고 포대화상의 여유와 넉넉함을 게을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편안한 분입니다.

굳이 형식적으로 설명드리자면, 미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입니다. 한반도의 땅끝이자 유라시아 대륙의 맨끝자락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는 절입니다. 아름다운 절은 창건설화도 아름답습니다. 먼 옛날 돌로 된 배가 땅끝마을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합니다. 비로소 배가 포구에 정박합니다. 의조화상이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에는 큰 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불교경전과 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16나한·불화 등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배 안에는 바위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바위를 깨니 속에서 커다란 검은 황소 한 마리가 나왔습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납니다.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현몽합니다. 꿈 속의 그 말씀대로 지은 절이 미황사입니다. 소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빛으로 빛났던 것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했답니다. 남전불교의 전통, 해양문화와 대륙문화의 만남이라는 반도의 지정학적 영향이 전설처럼 미황사에 남아있는 셈이지요. 이런 절에 금강산의 미련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금강산과의 인연을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듯, 금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님이 계십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인연법이고, 환희입니다.

전생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받는 이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하는 이것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법화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금강스님의 오늘입니다. 금강스님의 어제가 금강스님의 오늘입니다. 미황사의 오늘이 금강스님의 어제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오늘에 되살려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종교의 위기이자, 불교의 위기인 시대입니다. 기독교 등 서양종교로부터의 위기, 특히 절대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근본주의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종교의 세속화가 가져오는 이런저런 위기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들은 물론 한국불교만의 위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세계적 종교의 위기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종교가 사람의 모든 일상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치마저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연법과 도덕률을 지배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불교가 국교인 시절이 불과 800년 전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종교의 위기요, 불교의 위기인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종교 근본주의를 꿈꾸거나 종교 절대주의를 꿈꾸거나 종교 만능주의를 외쳐보기도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조용히 실천해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과 세속을 어떻게 일치시킬지에 대해 다들 고민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결사정신이고, 새로운 대승의 정신일 것 같습니다.

세속적인 논의가 있습니다.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보수적인 종교인들은 내면의 수행을 강조한다는 그런 이중적 잣대에 기초한 논의들입니다.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균형을 잃게 됩니다. 자칫 극단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중도의 길에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깨달음과 실천은 두 개의 수레바퀴일 것입니다. 어느 게 앞서고, 어느 게 뒤 서는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함께 굴러가며 결코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법륜입니다. 외향성과 내재성이 끊임없이 결합되어야 하고, 깨달음은 실천으로, 다시 실천은 깨달음으로 보완되어 하나로 굴러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과 실천은 지극히 겸손하고 편안하며 결코 문자 속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달마산 미황사의 불교는 어렵지 않습니다. 참 쉽습니다. 미황사의 부처님은 늘 편안합니다. 금강스님이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금강스님은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무상함을 깨닫고, 그 진리를 미황사 절 마당에 펼쳐 놓습니다.

‘참사랑의 향기’가 있습니다. 며칠간의 출가 프로그램이지요. 사실 떠나고도 떠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부처님 앞에까지 잔뜩 등짐을 지고 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짐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미황사 부처님은 엄격하지 않습니다. 금강스님은 그 넉넉함으로 모두를 조용히 껴안습니다. 나직함과 편안함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묵언으로 들려줍니다.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스님과 함께 예불에 나섭니다. 부도밭 산책길에 나섭니다. 원래 문자는 신과 제사장이 소통하기 위한 지극히 제한적인 속성의 제도였습니다. 그 문자를 이 시대의 언어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가장 편한 언어로, 나직하게 부처님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를 참배객들에게 펼쳐 놓습니다. 결코 어려운 문자나 어려운 표현이 아닙니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차 한 잔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부끄럽게 꺼내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꿈꾸었던 자유로움입니다.

한문학당이 있습니다. 부모님 품을 떠나본 적이 없는 요즘 아이들입니다. 서울에서 천리길입니다. 금강스님이 좋다고 그곳까지 쫓아가는 아이들이 늘어납니다. 매년 여름이면 정원이 초과됐음을 공지합니다. 스님의 도반스님들께서는 여기저기 부탁을 스님께 전하느라 힘겨워 합니다. 표현하기는 곤란합니다만, 부정입학 시비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그만큼 가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요즘 도시 아이들에게 산 속 미황사는 목욕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화장실도 불편합니다. 스스로 이부자리를 펴고 누었다가, 새벽녘에 일어나 정돈하고 청소해야 합니다.

‘장자(莊子)’가 억울해 하는 개념이 있지요. 바로 ‘대중’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성품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대중입니다.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었지요. 인도불교가 중국에 이사 오면서 잠시 빌어다 쓴 말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불교용어가 되고 말았지요. 이런 ‘대중 정신’에 가장 충실한 우리 아이들입니다. 맑은 성품이 제 빛깔을 드러냅니다. 반짝이는 금강석이 돼 갑니다. 함께 반야심경을 외우고,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고, 전통문화의 한 핵심인 한문을 배웁니다. 한문을 통해서 예의를 배우고, 고전문화를 배우고, 부처님 말씀에 자연스럽게 다가갑니다. 수료식 때는 법명을 받습니다. 서울에서 데리러 온 어머니를 만나 제법 의젓하게 큰 절을 하는 아이들이 늘어갑니다. 미황사는 늘 이런 식입니다. 금강처럼 단단한 금강스님의 외유내강이 바로 이런 식입니다. 금강스님의 금강석은 가슴 깊은 곳에 결코 변할 수 없는 부처님 진리처럼 자리합니다.

 
 

가을이면 괘불재가 있습니다. 대웅전 부처님 뒤편에 일년 내내 불편한 몸으로 둘둘 말려져 계시는 부처님이 있습니다. 그 날 하루 남녘의 맑은 가을 햇빛 아래 부처님은 바람과 햇볕과 대중들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괘불 부처님 얼굴이 환하게 타오르는 날입니다. 그날만큼은 대웅전 부처님도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나 계십니다. 사방천지에서 천 여명이 넘는 대중들이 미황사 마당에 모여듭니다. 이 날 미황사 아랫마을인 서정마을 사람들은 부처님께 추수감사제를 올립니다. 추수감사제는 기독교의 전통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랜 전통이요, 불교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이 날 우리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1년 농사를 마무리하고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부처님께 쌀을 올리고, 된장을 올리고, 고추를 올리고, 과일을 올립니다. 맑은 물 한 잔을 올리는 분도 계십니다. 모두가 부처님의 은혜요 공덕입니다. 미황사 부처님을 사랑하고, 미황사를 사랑하고, 금강스님을 좋아하는 팔도의 선남선녀들이 이날 달마산에 모여듭니다. 어떤 이는 피아노 연주로 공양하고, 어떤 이는 목소리로 공양을 합니다. 서정분교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마 전 이들은 스님 덕분에 통학용 중고버스를 새로 갖게 됐습니다.

달마산 뒷산으로 가을 달이 떠오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절 마당에는 강강술래의 군무가 펼쳐집니다. 가을 제법 찬 기운을 뚫고 마당을 뜁니다. 마당을 돌아갑니다. 저 멀리 남서해 바다가 은빛 물결을 일으켜 호응합니다. 미황사 부처님은 외롭지 않습니다. 늘 대중과 함께입니다. 그저 사하촌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중생들과 함께 뛰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한문을 배우고, 함께 깨달음을 닦아갑니다.

저는 간간히 스님들께 미련스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절에 부처님 보러 가는 걸까요.’ 그리곤 제 스스로 어리석은 답변을 내놓습니다. ‘아닙니다. 스님을 뵈러 갑니다.’ 부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십니다. 허공에도 계시고, 땅 속에도 계십니다. 토암산에도 계시고 달마산에도 계십니다. 미황사에도 계시고, 불국사에도 계십니다. 부처님은 은 하마음 속에 계십니다. 돌부처님도 계시고, 진흙부처님도 계시고, 나무부처님도 계십니다. 쇠부처님도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처님을 찾아도 계시고의 진리를 찾아도  나을 찾아 절로 쫓아갑니다. 부처님은 세상 어느 곳에 계신데도 굳이 절에 찾아갑니다.  나을 찾아 갑니다. 소를 찾아 나서듯,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저는 지극히 세속적으로 말씀드리곤 합니다. ‘스님을 뵈러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님을 만나러 갑니다. 스님이 들려주는, 스님이 보여주는, 스님이 그려주는 부처님을 만나러 갑니다. 옛날 이야기도 잠자리에서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읽어 주는 동화책이 훨씬 더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법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따라 부르는 동요가 더 맑은 법입니다.

부처님 말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같은 부처님 말씀도 경전을 통해 읽는 것보다, 영상을 통해 이해하는 것보다, 깨달음과 수행의 길을 여여히 걸으시는 스님을 통해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고 싶어합니다. 달마산 미황사에 살고계신 금강스님의 말씀과 몸짓과 표정과 수행을 통해 알고 싶어합니다.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온전히 껴안고 나와 이 땅 속세에서 실천하고 싶어합니다. 달마산 미황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금강스님이 계십니다. 이 겨울 달마산 미황사에 한 번 다녀오시지요. 그곳에 가면 ‘금강’보다 더 단단하고, ‘금강’보다 더 빛나는, 부처님의 참사랑 ‘금강스님’이 계십니다.


http://blog.ohmynews.com/cjc4u/31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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