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2-12 10:36
현공 스님과 금강스님의 성공적 파트너 십- samsung 보도 자료
 글쓴이 : 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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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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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해남 미황사의 작은 기적 - 금강 스님 인터뷰] “절의 주인은 주지(住持)가 아니라 절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등록일/작성자 2008-12-12 : 삼성
내용

백 년 넘게 인적이 끊긴 채 퇴락의 길을 걷던 땅끝마을 해남의 ‘미황사'가 20여 년에 걸친 중창불사(重創佛事)에 혼신을 기울인 두 스님의 노력으로 연간 10만 명이 찾는 지역 명소로 떠올랐다. 지역주민의 화합과 소통은 물론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등 사찰체험의 대중화를 이끌며 산중 사찰의 현대적 모델로 자리잡게 된 미황사의 작은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주지인 금강 스님이 권해주신 맑은 차 한 잔과 함께 1,300년의 숨결을 품고 현대 사찰로 새롭게 태어난 미황사 이야기를 들어본다.


퇴락한 천년고찰에서 현대 사찰의 모델로 떠오른 ‘미황사'

미황사를 병풍처럼 둘러싼 달마산은 달마대사의 둥글둥글한 생김새와 달리 깎아지른 듯 시원하게 솟은 암벽에 가까웠다. 달마산을 배경으로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응진당 앞마당에서는 진도 앞바다가 눈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말 그대로 땅끝, 아니 바다에서 보면 첫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미황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5시간 여를 달려오고도 땅끝에 솟은 산중턱까지 내처 올라와야 다다를 수 있는 이곳 미황사에 최근 10년간 전국 각지에서는 물론이고 먼 이웃나라에서도 방문객이 끊이질 않는다니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미황사의 사찰 운영사례는 조계종 전국 사찰 주지들의 연수에서 해마다 발표될 정도로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땅끝마을, 퇴락해가던 천년고찰 미황사가 이처럼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데는 금강·현공, 두 스님의 남다른 공력이 숨어 있었다.

 


금강·현공 스님, 아름다운 인연이 낳은 성공적 파트너십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3개월간 주인 없는 절로 버려진 상태였지요. 1,300년 전에 지어진 절은 퇴락해서 대웅전과 응진전만 남아 있었는데 일대가 온통 나무로 뒤덮여서 마당이 지금의 오분의 일 밖에 안 됐어요. 스승님과 함께 머물며 2년 동안 마당의 나무만 베었지요.”

현 주지인 금강 스님이 세상을 수행하다 다시 미황사로 찾아 든 것은 1989년. 당시 미황사는 지금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고 세월의 이끼를 거두어 햇빛이 들도록 터를 닦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얼마 후 금강 스님은 꼼꼼한 성격에 믿음직한 현공 스님을 불러들여 미황사 주지를 맡아 줄 것을 당부한 후 수행을 위해 절을 떠났다. 현공 스님은 그때부터 금강스님이 닦아 놓은 터에 전각들을 짓기 시작했다. 금강 스님이 전국의 선방을 돌며 수행에 정진하고 세상 공부를 하는 동안, 현공 스님은 묵묵히 사찰 건축에 전념했다. 약속을 한 것도 앞날을 기약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중창불사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현공 스님은 전국의 목재소를 돌아다니며 자재 선정에서부터 세심한 공을 들여 사찰 건축을 완성해 나갔다. 금강 스님은 세상에 나가 수행과 보살이라는 불자의 역할에 전념하면서도 틈틈이 미황사를 찾았다. 그렇게 10여 년간 미황사를 둘러싼 두 스님의 인연이 이어졌다. 마침내 금강 스님이 세상 공부를 마치고 미황사로 돌아온 2000년, 현공 스님은 말없이 주지 자리를 내놓고 절을 떠났다. 하지만 금강 스님은 현공 스님을 다시 찾았다. 금강 스님은 주지로서, 현공 스님은 계속 불사를 담당하는 회주로서 역할분담을 하기로 했다. 일반 사찰에서는 전례가 없는 역할분담이자 사찰 운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파트너십이었다.

“현공 스님은 꼼꼼한 성격에 타고난 솜씨가 좋으셔서 집을 짓는데 공력이 아주 대단하신 분이지요. 저 역시 1,300년의 역사와 자연, 훌륭한 사찰이 있는 이 공간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이 좋은 걸 다른 사람들도 느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산중 고립된 절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열린 공간'으로

현공 스님에 의해 미황사가 새롭게 단장을 하는 동안, 금강 스님이 주도하는 또 다른 중창불사가 진행됐다. 금강 스님은 절이 산중에 고립되기보다는 좀더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살아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랬다. 본격적으로 사찰 생활에 들어간 2000년, 금강 스님은 사찰 중 최초로 한문학당을 열었다.

“이곳은 자연 풍광도 아름답지만 1,300년의 역사가 흐르는 공간이지요.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은 평생을 좌우할 만큼 귀한 경험이 됩니다. 절은 수행을 하는 곳이지만 이 공간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사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지요.”

어린이들에게 한자 공부와 함께 산사에서의 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문학당은 대성공이었다. 이어 2002년, 월드컵을 맞아 외국인들의 한국 체험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미황사는 종단에 템플스테이를 하겠다고 신청했다.

“다들 비웃었지요. 가까운 절을 두고 그 먼 땅끝까지 갈 사람이 있겠냐는 거지요.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작은 나라입니다. 한국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지리상의 거리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미황사의 템플스테이는 전국 사찰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수행자 중심의 엄격한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사찰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면서도 일반 경험자 위주로 눈높이를 맞춘 세심한 배려 때문이었다. 여기에 좀더 엄격한 수행을 위한 참선수행 프로그램까지 갖추게 됨에 따라 미황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매년 4,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찾는 사찰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성공의 요인이라고 금강 스님은 말했다.

 


절의 주인은 주지가 아니라 마을 주민이다

그 밖에 미황사에서 치러지는 행사들은 단순한 법회를 넘어 지역주민은 물론 방문객들과의 소통과 대동을 위한 자리로 산중 법회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지역에 괘불(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은 부처의 모습 또는 부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거는 일) 신앙이 두터운 관계로 미황사에서는 매년 대표 법회로 ‘괘불제'를 지내는데 금강 스님은 이왕 법회를 지낼 거면 좀더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행사 때 각자 한 해 성과물을 제단에 올리도록 했다. 쌀, 깨, 고추, 호박 등 수확한 작물은 기본이고 CD, 책, 논문, 새로 태어난 아기 사진 등 별별 것이 다 올라온다고 한다.

“사람들이 수확물로 올린 것을 보면 감동적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불만이 많은데, 그런 계기를 통해 자기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지요.”

초파일에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하는 노래경연대회 역시 마을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잔치마당으로 노래 뿐 아니라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며 이웃 간의 정을 나누는 자리가 됐다. 필요한 행사 물품이며 부상도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다. 매년 절 마당에서 벌어지는 산사음악회는 이제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대중적인 행사가 됐다.

부처님의 말씀을 강변하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사람을 향하는 그 따뜻한 마음이 미황사의 오늘을 있게 한 근본 원인이 아닐까?
“미황사의 주인은 주지인 제가 아니라 마을 분들이고 또 그 후손들이라는 생각으로 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곳에 머물면서 이 공간을 어떻게 사람들을 위해 쓸 것인가, 또 무엇을 베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뿐이지요.”


지금, 여기,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자

금강 스님의 말처럼, 미황사는 사람들이 산중의 사찰로 찾아오길 바라기 전에 늘 따뜻한 마음으로 먼저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갔다. 가뭄 때는 지역주민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고, 매년 정초가 되면 금강 스님이 먼저 마을로 내려가 마을을 위해 당제를 지내 주었다. 마을의 초등학교 분교가 폐지될 위험에 처했을 때는 앞장서서 분교살리기 운동을 펼쳐 전교생 5명이던 학교를 40명인 학교로 되살려 냈다. 방문객은 언제든지 제 식구처럼 반갑게 맞아 주고 언제라도 주지스님과 따뜻한 차 한 잔과 더불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곳. 고향집 같은 그 편안함과 넉넉함이야말로 지치고 나약한 현대인들의 발걸음을 이곳 땅끝마을로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본질과 진실을 보는 눈이고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무슨 일에서든 좋은 결과를 얻게 되지요. 예를 들어 삼성 같은 세계적 기업이라면 물건을 하나 만들 때 얼마만큼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더 쓰임새 있게 만들 것이냐를 더 고민해야 하지요. 또한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기에 앞서 항상 지금, 여기,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길 바랍니다. 지금 현재를 인정하고 나를 인정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지요.”

 

연말연시가 다가온다. 올해는 해넘이·해맞이가 장관이라는 땅끝, 아니 바다의 첫 땅 해남 미황사 웅진당 앞마당에 서서 금강 스님의 말처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 이진경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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