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32
답사여행의 길잡이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글쓴이 : 미황사
조회 : 1,988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편(95년)

미황사

바다로 내민 해남반도,
그 끄트머리의 우리 나라 땅끝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기이한 산줄기 하나를 보게 된다.
바위 능선이 하늘과 땅 사이에 들쭉날쭉한 선을 그으며 한참이나 이어지는데, 나무가 별로 없는 윗부분 바위의 색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희끄무레하고 날카로운 띠가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이 산이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을 듣는 달마산,높이는 489m 이고 능선 길이는 12km 쯤 된다.

우리 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미황사는
그 달마산 서쪽 중턱에 앉아 먼 데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조그맣게 빛나고있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숲 사이로 나 있을 뿐 절 아래에는 숙박업소나 구멍가게 같은 것도 하나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 한창 번성하던 때에는 스님들도 많이 있었고 주변에 열두 암자를 거느렸다는 절이지만 지금은 대웅보전(보물 제 94호) 과 응진전(보물 제 1183호), 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이
남아 경내가 조촐하고, 숲속에 떨어져 있는 넓은 부도밭과 사적비가 번성했던 옛날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꼭 크고 기세 등등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퇴락했다고는 하지만 달마산은 결코 저막하거나 스사한 절이 아니다.
바위산 능선이 그려내는 거친 선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동백나무 숲으로 소복히 감싸인 절터와 경쾌하되 가볍지 않은 대웅전의 참한 품새를 마주하고 보면, 오히려 '이렇게 포근하고 곱게 저물 수 있다면 저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하는 기분까지 갖게 된다.

길가의 나무들을 일주문과 해탈문 삼으며 절을 향해 올라가자면
정면에 화사하면서 점잖은 대웅보전이 올려다 보이고 그 아래에 축대가 두 단 있다.
아래쪽 축대 위 평면에는 커다란 문루가 있었느니 풀 속에 주춧돌이 여럿 박혀 있고
두 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보전 앞마당이다.
마당 가운데 기다란 돌확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마당가 샘에는 돌담을 두르고 대쪽을 엮은 지붕을 씌웠는데 이끼가 끼고 담쟁이가 기어올랐다. 왼쪽으로, 살림집의 그것처럼 아담한 화단 너머에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집채가 있고 대웅전 뒤 위쪽에 자그마한 응진전이 보인다. 근래에 조금씩 손을 보고 있어서 마당 가운데 새로 만든 석등이 섰고,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건물 두어 채가 서 있다.

지금 미황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정도이다.
그러나 이 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참 좋은 곳에 갔었다'는 자랑을 참지 못한다.
그 이유를 찾자면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전의 앉음새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겠고, 게나 거북 등이 새겨진 독특한 대웅보전 기둥 초석과 대웅보전이나 응진전 안벽과 처장의 18세기 중반 벽화들을 만나면서 갖는 즐거움, 또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황사를 찾는 즐거움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숲속의 부도밭과
그곳까지 가는 오솔길이 아닐까 싶다.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바닥에는 산죽이나 진달래 등이 섞여 자라는 숲 속 길로 소풍 가듯이 걸어 들어가면 돌담에 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물론 규모도 크지만, 이 부도밭의 감동은 규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돌면서 마음이 순화되는 데 있다. 부도와 비석 사이를 맴돌다가 다시 오솔길을 걸어 나오노라면, '남 모르는 보물을 혼자 본 후 아무도 모르라고 덮고 내려오는' 듯한 흐뭇함이 가슴을 채운다.

미황사의 창건 연대나 사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다만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18년(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가 하나 있다. 비문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적고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돌로 된 배(石船)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며 사자포(땅끝마을) 앞바다에 나타났다. 배는 며칠 동안이나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곤 했는데, 의조(儀照)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사람(金人) 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 같은 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중·53선지식·16나한의 상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고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세큰 소가 되었다.
그 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금강산이 일 만 불을 모실 만하다 하여 불상들을 싣고 갔으나 이미 절이 많이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는데,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의조화상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나섰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가다가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 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 자를 딴 것이라 한다.
민암은 사적기에 이 창건설화를 적은 후 "석우(石牛)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로는 의심이 갈 만하나 연대를 따져 고증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 성상 등이 완연히 있다"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미황사에는 설화를 뒷받침할 만한 유물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 조선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도 없고 의조화상이라는 인물의 행적도 알 수가 없다.

한편, 나름의 상징체계와 어법을 가진 설화를 곧이 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이 창건설화는 우리 나라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 북쪽을 거쳐 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서남 해안지방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서 그 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 그 중에서도 미황사 창건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장거리일 경우 유고보다 바닷길이나 물길이 먼저 발달했던 것과, 문화의 동질성이 산맥을 경계로 끊어지고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도 북쪽의 육로로만 불교가 전해졌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창건 이후 수백 년 동안의 미황사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이듬해에 만선(晩善)이 중건하고 현종 1년(1660)에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다고 한다. 미황사의 규모가 지금처럼 작아진 것은 언제, 무엇 때문일까? 절 아래 서정리 노인들 사이에는 창건설화만큼이나 극적인 미황사 망한 사연이 전해 온다. 즉, 150년쯤 전만 해도 미황사는 스님이 40여 명이나 있고 재산도 많은 큰 절이었다. 당시 절에서는 큰 중창불사를 벌이려고 스님들이 '궁고'를 꾸려 해안을 돌며 일종의 순회공연 을하고 시주를 모았다.
어느 날, 설쇠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받는 꿈을 꾸고는 오늘은 쉬자고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 않았다. 그들은 완도, 청산도로 공연을 하러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서 배는 침몰하고 설장고 맡은 스님 하나만 빼고는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남은 것은 절에 있던 나이 많은 스님 몇 분과 궁고 꾸리느라 투자한 빚더미 뿐, 미황사는 그만 망해 버렸다.

전설 같은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미황사 아래 서정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는 을씨년스런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들 궁고 친다'는 말을 속담처럼 쓰고 있으며, 송지면 산정리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12채 궁고의 깃발에는 삿갓 쓴 스님이 바다거북을 탄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미황사에는 가뭄이 들 때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이 전해져 온다. 아무 때나 볼 수는 없지만, 영조 3년(1727)에 조성된 이 괘불은 근래에도 몇 차례 '영험을 증명' 한 적이 있고 심지어 기우제 도중에 비가 쏟아져 배접이 떨어진 일까지 있다. 1993년에 손상된 괘불을 수리하고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그림은 독존도 형식이며 머리 양옆에 합장한 부처가 세분 앉아 있고 무릎 좌우에는 향로를 든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 상이 그려져 있어서 창건설화를 반영 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집으로,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려 절 전체에 안정감을 주는 중심법당이다. 1982년에 보수할 때 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이 적힌 대들보가 발견되었었는데 그에 따르면 대웅보전은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막돌을 쌓아올린 높직한 기단 위에 연꽃잎을 새긴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 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특히 주춧돌에 다른 세서 보기 드물게 게나 거북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어서 창건설화와 관련된 상상력을 자극한다. 포작안으로 4출목, 밖으로 3출목으로 화려하게 짜여 조선 중후기 다포집 양식의 특징을 잘 보인다.
건물 외부는 비바람에 닦여서 단청이 다 지워지고 나무결이 보드랍게 살아 따뜻한 느낌을 주며 정면 기둥 위의 용머리 장식 등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법당 안에는 가운데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가 걸려 있으며 천장 우물반자에 범서로 '옴마니 반메훔' 자가 적혀 있다. 그 주변은 학이나 모란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그밖에도 벽 위나 처장에 제불도와 먹선으로 그린 나한도 등 눈길을 끌 만한 그림들이 있다.
대웅보전 뒤편에는 '비를 내리게 하는' 괘불을 넣어 두는 기다란 목궤가 있고 앞쪽 계다란 아래에는 괘불걸이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다른 시기의 것인 듯 하나는 위쪽이 둥글고 또 하나는 네모지게 마무리되었다.
미황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 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밭

이곳저곳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다 보면 보물로 지정 받기는 커녕 주목받은 적도 없지만 '보물'이라 부르고 싶은 유물이나 유적을 만날 때가 있다.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인 가치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찾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일으키는 작용을 생각한다면, 미황사 부도밭과 거기까지 가는 오솔길을 '사적인 보물'로 지정할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부도밭으로 가는 길은 대웅보전 앞을 가로질러서 오른쪽 숲속으로 나있다. 숲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백나무와 소나무로 가득 차서 아늑하고 신선하며 바닥에는 온갖 풀과 산죽, 진달래 덤불이 깔려 있고 길가에 작은 물줄기가 솟아나기도 한다. 두어 차례 길이 갈라질 때마다 윗길을 택하며, 할랑하게 걸어도 15분 정도면 부도밭에 닿는다.
부도밭에 앞서 만나는 것은 반쯤 무너진 낮은 돌담과 아담한 대밭이다. 웬 대밭인가 하고 의아해하는 사이, 길 오른쪽 축대 아래에 비석이 하나 보인다. 이것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미황사 사적비로, 미황사 창건설화를 소개한 민암의 사적기가 여기에 적혀 있다. 비석의 폭은1.3m 정도이며 아래쪽이 땅속에 묻혀 있는데 드러나 있는 높이가 2.9m 가량 된다. 돌담으로 둘린 이 근처는 통교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대밭이 끝나는 무렵쯤에는 맑은 물이 넘치는 큰 돌확이 싱싱한 풀잎에 싸여 있다. 거기서 또 무너진 돌담을 넘으면 곧 부도밭, 모두 24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잃어버린 절의 역사를 말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서 있다. 규모 면에서는 근처의 대둔사 부도밭에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소탈하고 정갈한 분위기에서는 이곳이 윗길인 듯하다. 둥글거나 네모진 몸돌에 지붕돌을 얹은 이곳의 부도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18세기 중반을 넘는 것은 없어서, 150년 전쯤 절이 망했다는 아랫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벽하당, 송암당, 영월당, 송월당, 죽암당, 설송당 등 선사들의 명호가 새겨진 부도와 비석들은 특별히 빼어난 것 없이 모두 그만그만하고, 전체적으로 삼엄한 긴장감이나 엄정함 같은 것을 풍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도들 사이를 거닐며 하나하나의 모습과 조각들을 들여다 보노라면 선사들의 부도에 대해 마땅히 바쳐야 할 경건한 태도는 어느 결에 저만치 비켜나고 마치 어린아이 때로 돌아간 듯한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부도마다 새겨진 거북, 게, 새, 두꺼비, 연꽃, 도깨비 얼굴, 또 용머리들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꾸밈이 업어서 순식간에 사람을 무장해제 시켜 버린다. 특히 거북이나 게 등이 많은 점은 대웅전 주춧돌의 그것과 함께 창건설화의 내용을 상기시키며, 이끼가 덮인 지붕돌이나 받침돌에 새겨진 용머리들의 표정은 시골 사람들의 사진첩을 보는 듯 소박하고 다양하다.
절에서, 그것도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밭에서 이런 종류의 즐거움을 맛보기란 드문 일일 것이다. 한적한 산 속에서 뜻밖에 맛보는 천진한 기쁨은 칼날 같고 서리 같은 설법 못지 않게 사람을 감화시킨다. 미황사 부도밭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돌아 나오는 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결 느긋해져 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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