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36
[세계일보] 산사에 낭랑한 아이들 소리...
 글쓴이 : 세계일보
조회 : 1,965  
해남 땅끝마을 미황사 한문학당


남해 땅끝마을 천년고찰 미황사(美黃寺).
아직 달마산은 새벽 미명으로 어슴푸레한데,
일군의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산하게 움직인다.

새벽 4시에 일어난 아이들은 이미 세면은 물론 한문 암송까지 마쳤다.
이제 아이들은 대웅전이 바라보이는 누각의 넓은 공간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아침공양을 기다리는 중이다.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중앙에 정좌한 금강스님이 죽비를 치자
일제히 발우(鉢盂.사찰에서 승려가 쓰는 밥그릇)를 펼쳐놓는다.
검은 옻칠을 한 발우는 밥과 국, 반찬과 천수(天水)를 담는 네 개뿐이다.
공양 분배 소임을 맡은 아이들이 일어나 밥과 국과 천수가 담긴 큰 통을 들고
아이들 앞으로 가서 각자 요구하는 분량 만큼 덜어준다.
두부 콩조림 김치 감자 단무지가 담긴 앉은뱅이 소반을 돌려가며 아이들은 반찬도 담는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스님은 아이들의 숨소리마저 잦아들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으로 누각 바깥에서 속절없는 풀벌레소리만 들려온다. 스님이 다시 죽비를 치자 아이들은 일제히 합창하듯 공양발원문을 암송한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청정하게 살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드디어 아이들은 아침공양을 시작한다.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만 달그락거릴 뿐 누각 안은 고요하다.
각자 공양이 끝나자 남겨놓은 단무지 하나로 발우에 묻은 찌꺼기까지 깨끗이 닦아낸 후
천수로 헹군다.
하얀 천으로 발우를 보송보송하게 닦은 뒤 하나로 포개놓는다.
퇴수는 당번소임을 맡은 아이들이 들고 돌아다니는 통에 붓는다.
양쪽에 거두어들인 퇴수통을 들고 두 명의 아이가 스님에게 간다.
아이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마친 스님은 두 개의 통을 들여다보다가
그 중 한 통에 자신의 퇴수를 붓는다. 순간, 정적이 깨지고 아이들이 환호한다.
우리가 또 이겼다!
퇴수가 더 깨끗한 쪽에 스님이 물을 버린다는 사실을
그들은 벌써 7일째 계속된 발우공양에서 감지한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누각 바깥의 대나무 그림자가 아침 햇빛을 받아 일렁인다.


이 아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초등학교 4∼6학년생 46명으로, 지난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열린
미황사 한문학당 6기생들이다.
흙과 나무와 산과 노을을 배경으로 산사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
고기는 물론 라면이나 음료수까지도 먹지 못하고,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구경도 할 수 없는 7박8일의 일정은
아이들에게 고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사에 들어와 하루 이틀이 흐르자 아이들은 금새 서로 정을 쌓고,
엄숙한 산사의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세면과 청소를 마친후
부도전까지 포행을 다녀왔고 이제 아침공양도 마쳤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다도(茶道)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다도가 끝나면 오전 한문공부가 이어진다.

한문교육을 맡은 대흥사 법인스님이 강단에 서자
아이들은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양 환호한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개그맨 못지 않은 인기인이다.
법구경과 명심보감 등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금강스님이 만든 교재
'수심보경(修心寶鏡)'을 아이들은 배우고 있다.
오늘 배우는 글귀는 '千千爲敵'이다.
"千千爲敵하여(백만명을 적으로 삼아) 一夫勝之라도(한 사람이 백만명을 이길지라도),
未若自勝하여(자기를 이겨), 爲戰中上이니라(전사 중에 최고가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스님이 "연필을 들고∼"를 선창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허공에 한자를 쓰기 시작한다.

스님이 묻는다. "미(未)자 들어가는 말이 또 뭐가 있지요?"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외치는 데 어떤 녀석이 "미황사요!"라고 엉뚱하게 답한다.
아름다울 미(美)자를 혼돈한 아이에게 웃음을 짓던 법인스님은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남주냐"고 묻자, 아이는 냉큼 "스님은 남 주고 있잖아요"라고 답한다.
스님은 박장대소다.
공부가 끝나갈 무렵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스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외친다.
다도시간에 적멸스님은 아이들에 노래를 세곡이나 불러주었다고 떼를 쓴다.

점심공양을 마친 후 문화체험 시간,
다시 한문교육, 빨래와 청소,
저녁공양, 한문교육, 참회와 다짐의 시간으로 하루 일과는 저녁 9시에 마무리된다.

도심의 시멘트 공간에서 컴퓨터 게임과 텔레비전에 매달리다가
학원만 오가던 아이들의 하루는 땅끝의 산사에서 이렇게 저문다.

아이들은 오후 문화체험 시간에 여러가지 일을 했다.
미황사 주변의 자연에서 주제를 정해 채집한 뒤 토론도 하고,
남해의 금강이라 불릴만큼 바위들이 아름다운 달마산에도 올랐으며,
땅끝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도 했다.
여름밤 대웅전 앞마당에 모여 하늘의 별자리를 찾기도 했다.

미황사 앞으로 펼쳐진 다도해로 지는 해가 뿌리는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한 녀석이 엄숙한 발우공양시간에 창호지를 바른 창문 밖으로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정적을 깨뜨렸다. "스님! 노을이 그림 액자 같아요."
스님은 정적을 파괴한 녀석이 얄밉다기보다 예뻐서 껴안주고 싶었다.
한문학당을 시작한 동기가
아이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보다 깊어지는 마음 그릇을 만들 계기를 제공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 녀석은 그 소망을 충분히 이루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 있는 것들과 눈을 맞추고 옛 기와의 문양을 탁본도 하고
달마산 꼭대기에 올라 완도와 진도를 굽어본 아이들.
그들에게 기실 한문을 배우는 것은 이미 주목적이 아니었다.
경쟁만을 배운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소양이야말로
그들이 배워가는 최고의 자산인 것이다.

졸업을 하루 앞둔 저녁, 아이들은 저녁공양을 마친 후 百八寫經(백팔사경)을 시작했다.
108개의 네모칸이 그려진 종이를 앞에 두고
그 칸을 하나씩 한자로 메꿀 때마다 절을 해야 한다.
팔만대장경도 그렇게 만들어졌듯이 온 마음을 모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의식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무리없이 이 지리한 과정을 견디어낸다.
그러나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다.
한 녀석은 제일 먼저 한자를 쓰고 일어나서
아직 궁둥이를 하늘로 향한채 글자를 쓰고 동료들을 내려다보며
엉덩이를 흔들며 자신이 제일이라고 자랑한다.
스님은 녀석을 매운 눈으로 하릴없이 쏘아볼 뿐이다.

108자가 완성되자 아이들은 대웅전 앞마당에 모여
자신의 소원을 말미에 적은 그 종이를 태웠다.
하늘로 불길이 솟구치자 아이들은 환호한다.
소지를 한 후 아이들은 연등을 하나씩 들고 경내를 일렬로 서서 돌기 시작한다.
미황사의 밤에 연꽃들이 출렁인다.
하늘에 떠 있던 별들이 모두 미황사로 내려온 듯 하다.

이튿날 졸업식을 마친 후, 라면과 고기를 먹는 꿈을 꾸었다는 녀석들이
빨리 하산해서 소원을 이룰 생각도 잊은채 자원봉사 선생님들과 스님을 붙잡고 운다.
금강스님은 미황사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깊은 사랑을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숲길을 뚫고 부도전까지 아이들 손 마주잡고
새소리 들으며 단 공기 마시며 걸었습니다.
아이들의 낭낭한 글 읽는 소리는 그대로가 아미타불의 법문입니다.
그들이 넓은 마음과 맑은 몸과 향기로운 입을 간직해주기를,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줄 알기를,
이 곳이 마음의 고향이 되어 추억만으로도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여름이 행복합니다."

/해남 미황사=조용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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