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10
[전라도 닷컴] 한문학당(익숙한것들과의 이별)
 글쓴이 : 전라도닷
조회 : 1,911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해남 미황사 초등생 한문교실



툇마루 아래 흙묻은 운동화들이 수십켤레 놓여있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문을 열고 침묵을 깰까봐 살금살금 들어가 앉았다.

오전8시부터 9시까지는 우리차 마시는 시간. 금강스님이 앞자리에서 다도를 설명하고, 학생들은 다섯명씩 6개팀이 모여앉아 스님의 설명대로 따라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다. 손놀림도 조심스럽고, 오른발은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밑에 넣고 앉는 반가부좌 자세다. 집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자세이고, 즐겨마시지 않았을 차인데도 익숙하다.

지난 3일부터 7박8일일정으로 해남 미황사에서 열고 있는 한문교실. 지난 여름에 이어 두번째. 제주도, 서울, 일산, 수원,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초등 4~6학년 30명이 모여들었다.
여학생 11명, 남학생 19명이 달마반, 보시반, 애어반, 이행반, 동사반으로 생활한지 오늘(8일)로 8일째.

'달마반'이나 '보시반'은 그나마 알겠으나 애어반, 이행반, 동사반은 도통 그 뜻도 모르겠다.
한 아이가 참고서적을 펼쳐보이며 설명해준다.
"애어(愛語)는요 나쁜 말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항상 사랑스런 말을 하는 것이고요, 이행(利行)은 친구에게 이익되는 일을 하는 것, 동사(同事)는 친구들과 즐거움,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이래요."
설명해주는 폼이 의젓하다.

귓속말로 "재미있니?"하고 물었더니 "재미없어요. 지루해요"한다.
"왜?"
"컴퓨터 게임도 못하고, 텔레비전도 못보니까요."
"어떤 시간이 제일 지루해?"
"한문시간요. 하루에 7시간 정도해요. 그렇지만요, 가르치는 법인스님이 휴식시간을 많이
주니까요 인기는 1위에요."
"집에 돌아가면 무엇을 제일 먼저하고 싶어?"
"잠 실컷 자고 싶어요. 그리고 목욕하고, 고기먹고 싶어요. 여기선 버섯만 나와요.
아무리 버섯이 몸에 좋다지만 이젠 질렸어요. 독버섯만 빼고는 다 나와요."
어른도 힘든데 하루 7시간씩 생소한 한문공부하려니 지루하기도 하겠다.

미황사 주지인 금강스님(왼쪽사진)은 "요즘 애들은 너무 많이 누리고 부족함이 없이 지냅니다. 아파트생활에서 벗어나 대자연속 고풍스런 사찰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해보는 것이지요. 자기스스로 마당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컴퓨터와 텔레비전에서 벗어난 생활을 해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문교실 운영목적을 말한다.

혹시 부모들이 떠밀어서 학생들이 들어온 것은 아니냐는 말에 그런 강요가 염려스러워 학생 자필소개서와 내가 사는 행복한 삶, 그리고 부모들의 자녀소개서를 받았단다. 13일부터는 지난 여름방학때 참여했던 학생들이 재심자반으로 다시 들어오는데 30명 중 22~23명이 다시 온다. 못오는 학생들의 경우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가 대부분 이유이다.

잠 실컷 자고 싶다는 말에 하루 일정을 봤더니 새벽5시가 기상시간. 일어나자마자 스님들 따라서 예불하고 6시에 한문암송, 6시30분 아침공양과 청소시간이다. 새벽 5시 기상시간이라. 집에서라면 상상도 못했을 시간이다. 그래서 애들은 처음에 일어나는 시간이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한결같이 얘기한다.

잠깐 쉬는 시간은 여느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대로 서로 뒤엉켜서 놀고, 뛰어다니고,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가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한 산사 맞나 싶을 정도다. 뒤엉켜노는 아이들 무리에 스님과 보조교사들도 빠지지 않는다.

오전9시. 죽비소리 딱딱 나자 그 소란스러움이 마술병에 쏙 빨려들어간듯 조용해진다.
"수신, 나의 행실을 맑게 하고
수심, 나의 마음을 맑게 하고
수세, 우리의 세상을 맑게 합니다"
한문을 가르치시는 법인스님의 말씀을 학생들이 따라 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됐다.

"연필을 들고, 하나 둘 셋 넷...밑으로 죽죽... 틀어막고...밑으로 쭈욱. 병아리 삐약삐약. 돼지 꿀꿀. 오리 꽥꽥. 영어로 시작"

한자 획순대로 따라하는 것이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다. 법인스님이 일부러 견본 한자와 틀리게 쓰기라도 할라치면, 여지없이 "스님 틀렸어요" 하고 지적한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낭랑하게 따라하는 아이들의 한문읽는 목소리가 너무 듣기에 좋다.
깊은 산사. 바람소리 목탁소리 들으며 뜻만 생각해도 마음이 경건해지는 한문을 읽고 쓰는 그 광경. 부모들이 자식들 목에 음식넘어가는 소리와 글읽는 소리가 제일 듣기좋다든가.

법인스님은 한문수업을 인문적 교양쌓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스님은 첫 수업시간에 애들에게 "기능은 자랑이 아니다는 것과 진짜 부끄러운 것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시험이나 경쟁 과제물이 없다. 누구 잘한다고 지명해서 시켜보는 것도 하지 않는다. 한문수업의 목적은 글속에 들어있는 그 뜻을 파악하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을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한문수업이 끝나고 11시30분부터는 점심 발우공양시간.
발우공양이란 수행하는 스님들의 식사법이다. 발우공양은 마치 부처님을 모시고 함께 공양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한다. 발우공양의 의미에는 모든 사람이 똑 같이 나누어 먹는 평등, 철저히 위생적인 청결, 조금도 낭비가 없는 절약, 공동체정신이 담겨있다.

수행의 의미여서 그런지 애들과 함께 웃고 농담하던 모습과 달리 금강스님의 자세가 근엄하다. 음식을 나눠주는 역을 맡은 친구들이 음식앞에서 예를 올리지 않고 바로 분배로 들어가려하자 다시 시킨다.
밥과 반찬은 먹을 만큼만 스스로 던다. 반찬은 김치전과 두부, 배추김치, 김. 노란 단무지 한개가 밥그릇에 놓여있다. 밥을 다 먹은 후 숭늉이 부어지면 단무지로 그릇에 묻은 밥알 등을 깨끗이 닦아내는데 쓴단다. 그 숭늉물도 모두 마신다. 나중에 밥알 한톨이라도 설거지물에 떠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음식이 다 놓여지면 공양발원문을 낭송한다.
한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로하고
청정하게 살겠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있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식단이다. 밥을 먹는 30분동안
익숙치 못한 반가부좌 자세때문에 대부분 다리가 저리고 아파서 몸을 비틀고 몸살을 한다.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 식사시간. 말없이 조용히 하려니 친구들의 작은 몸짓하나에도 웃음이 터져나오려는데 그걸 참으려니 더 죽겠다. 예슬이는 하마터면 웃음참으려다 음식을 뿜어버릴뻔했다.

발우공양이 끝나면 포행시간. 오늘은 부도전으로 한가한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스님들은 애들과 어깨 겯고 이런얘기 저런얘기 나누면서 다녀온다. 애들이 잠자는 시간, 문화체험시간
다음으로 좋아하는 시간이다.

오후1시부터는 문화체험시간. 지금까지 연만들기, 전통등 만들기, 절탐방 등을 했다. 오늘은 연등만들기. 10일날 졸업식때 소원빌기 행사에 사용할 연 등이다. 연꽃잎 한장한장 정성스럽게 만든다.
"스님꽃잎은 그렇게 예쁜데 제 것은 왜 이렇게 안예뻐요?"
"이걸 잘 보고 새의 뼈처럼 이렇게 날카롭게 만들어봐."
이렇게 저렇게 비교해서 겨우 만들어 냈다. 그러나 가족들의 건강과 올해는 좋은일만 있으라는 기원을 담아 정성스럽게 만든 연등이다.
다른 날은 문화체험시간이 끝나고 오후3시부터 다시 한문교육이지만 오늘은 없다.
오후4시부터는 소임청소 세탁시간이고 5시에는 저녁공양을 한다. 6시 저녁예불, 6시30분 한문예습, 복습. 오후9시면 취침.

익숙한 것들과 단절된 7박8일. 말은 힘들고 지루하다고는 했지만 얼굴들이 모두 밝고 활기차다. 생소한 생활이어서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뿐 아이들은 서서히 함께 하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자세를 몸으로 익혀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앞으로 뭔가 더 잘해낼 수 있을 것같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학생들은 내년에도, 중학생이 되어도 기회가 있으면 다시 미황사를 찾겠다고 입을 모은다.

아이들이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 한 학생의 편지를 옮겨싣는다.

나를 이세상의 빛을 보게 하신 父母님께...
비바람이 몰아치고 기왓장이 떨어져 나가는 오늘... 이런 날은 부모님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립니다. 세속의 번뇌와 즐거움, 현대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미황사로 단기출가한지 6일... 처음에 왔을 때는 새로운 일상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에 젖어 있었는데, 지금은 차츰 익숙해집니다. 새벽5시에 일어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드리는 예불드리는 일, 약7시간씩 공부, 또 6시에 예불, 다도, 등만들기, 달마산 산행, 미황사탐방 등 문화체험, 돌이켜보면, 다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처음 몇일 동안은 너무 힘들고, 집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돌아가고만 싶었습니다. 게다가 부모님 얼굴도 아른거리고... 그러나 언제인가 생각해보니, 지금은 내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중엔 귀중하고 큰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에 오늘도 이를 꽉 물고 생활합니다.
...<중략>
밤이 깊어가는 미황사의 큰방에서 아이들이 "스님 우리 사진찍어요"하고 조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끼었다.
"나 예쁘게 찍어주세요." 뒤편에 보이는 그릇들은 각자의 식기.
"우리도 빠질 수 없잖아요. 여자들 빼고 우리만 찍어주세요"

기사출력일 < 2001-01-10 00:46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105 440 546,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