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3-08 12:45
21세기 한국불교 -- 월간 불교 문화
 글쓴이 : 다경
조회 : 605  
수행은 지금까지의 사고를 끊기 위해 하는 것_금강 스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화엄경』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일체 중생이 여래와 같은 깨달음의 성품이 있건만 분별 망상으로 인해 알지 못하고 있구나.” 깨달음이란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 성품이 있더라는 말씀이지요.
 
『육조단경』을 보면 그 내용이 직접적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는 대중에게 “선지식들이여,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의 말씀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깨달음의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기 생각과 경험, 학습한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끊임없이 윤회하는 게지요. 그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자신에게 청정한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성품에는 마하반야바라밀법, 깨달음의 법이 무궁무진하게 있습니다. 그걸 드러내 보이라는 겁니다.저는 늘 어떻게 하면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까 고민합니다. 미황사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지난 1월에도 8박 9일간 참선 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저녁마다 제가 한 시간씩 강의를 했는데, 그때 대중에게도 말한 내용입니다.

나옹 선사에게 하루는 어느 스님이 찾아와 “스님, 도가 뭡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옹 선사가 답하길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했지요. 이 일화를 곁들이며 제가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졸리면 자라. 내일을 생각해서 오늘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지 마라.” 하지만 우리는 보통 어떻습니까? 졸리지도 않은데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망상을 피우지요.
 
그럴 땐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이야길했더니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 덕에 8박 9일간 한순간도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용맹정진했지요.
수행은 왜 하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까지의 사고를 끊기 위해섭니다. 선종의 3조인 승찬 대사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자신의 병이 다겁생으로 지어온 업 때문이라 생각했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는 포기한 채 다음 생엔 이런 업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혜가 대사를 만나지요.

그리고 온통 한마음으로 “스님, 제가 업이 많아 이런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을 없애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그때 혜가 대사가 말씀하십니다. “좋다, 네 업이 어디 있는지 내게 한번 보여봐라.” 그러자 온통 한 가지에만 집중했던 승찬 대사의 생각이 전환됩니다. 그리고 본래 참마음 자리를 보게 되지요.


21세기 한국 불교도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만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방법은 바로 무념,무주,무상에 있습니다.


승찬 대사가 지은 『신심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 즉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지 간택함만을 꺼릴 뿐이라는 뜻입니다. 우린 일상에서 늘 그 구별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지요. 오늘도 그러기 위해서 여기 오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좀 더 잘 사는 방법을, 지혜로워지는 방법을 밖에서 찾기 위해….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강해지는 건 분별의식입니다.

그래서 좋은 걸 추구하고 나쁜 건 멀리하게 되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 마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대가 쌓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하고 말지요.

실망하면 화가 나고…. 우리네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 이 육신을 유지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싶죠? 하지만 그렇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질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강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선택을 하는 순간, 그 반대편의 깊이는 점점 더해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닌 지적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판단하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미 2,600년 전에 발견된 누구에게나 있는 지혜와 덕성이 드러납니다.

청정한 본래 마음이, 그 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깨달음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동안 내가 보물처럼 여기던 시각을 버리면 깨달음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깨달음이나 도가 자신과는 아득한 것들이라 생각하지요?

10년 전 제가 백암사 운문암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땝니다. 저는 워낙 차를 좋아해서 선방에 다닐 때도 차를 싸서 가지고 갔습니다. 제가 차를 마시면, 제가 낸 차가 맛있다며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들곤 했지요.
 
한 달가량은 차를 마시며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두어 달쯤 지나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다 보니 이런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행 다녔던 이야기, 지난 해제 때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그런데 사람들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것만 말하는 게 아니죠.

그래서 차를 마시는 일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음 철에는 열심히 공부만 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마침 그다음 철에 모인 스님들이 아주 훌륭한 분들이었어요. 25년간 선원에서 한 철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시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일본에서 선학 박사를 받고도 “박사보다 선사가 위야”라며 정진하시는 분,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선어록을 다 외워 말만 하면 법문인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각오를 다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첫날, 또 차가 마시고 싶지 뭐예요. 그래서 혼자 몰래 차를 마셨지요. 그런데 스님들이 저를 찾아내서는 차를 내라고 청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그다음 날부터는 다른 스님들이 차를 마실 때 전 선방에 가만있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스님이 저를 찾다가 선방 문을 열더니 “여기 있었네” 하고는 도로 문을 닫고 가데요. 스님들은 공부하는 사람 절대 방해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바로 이 방법이구나’ 하면서 다음 날부터는 아예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양치만 하고 선방에 앉았습니다.
 
점심 먹고도 양치만 하고 선방에 앉아 있었지요. 남들이 산책을 하건 차를 마시건 상관없이 오로지 선방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탈이 났어요. 밥 먹고 바로 앉으니 소화가 안 되어서 답답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밥을 조금만 먹고, 그마저도 입안에서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씹은 후 삼켰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니, 저녁 10시에 다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식사량도 적은데다 하루 종일 앉아서 참선만 하니 정신이 맑아져 잠이 오지 않았던 거죠.

얼마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그렇게 누워 있다가 새벽에 별 수 없이 다시 일어나 앉았어요. 그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니 결국 용맹정진이 되더군요. 그런데 용맹정진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25년간 선원에서 공부만 했다는 스님이나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 선어록을 모두 외운 스님에게 제가 속고 있었음을 깨달은 겁니다. 그 스님들이 훌륭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들리고 보이는 경력에 속아서 그들을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런 깨달음이 있자 옆에 앉아 있는 스님들 모두가 본래의 모습으로 생생히 다가왔습니다.

한 스님 한 스님 다 똑같이 아름답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보였어요. 밖으로 나오자 나무들도 달라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전 나만의 시각으로 나무를 대했지요. 그 시각이 없어진 거예요. 그러니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소중해 보일 수밖에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앞으로 속진 않고 살겠구나. 그동안 내가 경험하고 학습한 시각으로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진 않겠구나. 생생히 그 자체로 바라보겠구나.’ 이처럼 간택함 없이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되자 환희심도 나고, 공부도 더 잘되었습니다.

보는 것, 느껴지는 것마다 새로운 공부로 다가왔지요. 그리고 지극한 도가 어렵지 않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훨씬 더 행복하고 자유롭고 마음이 고요해졌고요.『육조단경』에는 ‘무념’, ‘무상’, ‘무주’의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이 세 가지는 다름 아닌 분별심을 떠난 시각을 뜻합니다. 그런 걸 중도라고 하죠. 좋다 싫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아름답다 추하다는 식의 선택, 분별하는 시각을 떠난 것이 중도입니다. 이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로가 함께해야만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무와 사람,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죠. 무념, 무상, 무주를 다른 말로 하면 평화로움, 행복함, 자유로움입니다. 이거야말로 우리가 늘 추구하면서 사는 것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작 그 반대로 치닫고 있죠.
 
평화로움을 지키고자 같은 종족끼리 선을 그어놓고 총칼을 들이댑니다. 가정, 지위, 재산을 공고히 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것들에 의지합니다. 그런다고 평화로울 수 있나요? 아닙니다. 평화로움은 바로 무념에 있습니다.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망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없는 것이죠.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지면 마음이 고요해져요. 생각이 많으면 아무리 고요한 선방에 있어도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무상은 행복과 관계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지요? 하지만 행복은 밖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 바로 우리 안에 있거든요. 무상을 깨치면 행복해집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상이 없다는 게 무상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정된 상을 갖고 있습니까. 아버지에 대한 상, 어머니에 대한 상, 친구, 애인, 아들딸에 대한 상…. 고정된 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있는 자체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만으로 정말이지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상이 있으면 기대가 생기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늘 불만인 채로 괴롭게 살 수밖에 없지요. 나이 들면 갈 곳도 대화할 친구도 없어지게 마련이고, 두려움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돼요.

자기 안에 벽을 높이 세운 채 자기 상만 고집하면 절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나무, 새, 지구의 모든 것도 마찬가집니다. 고정된 상을 없애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무주는 자유와 관련됩니다. 어제 어떤 분을 만났는데, 원래 교사를 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생활여행자’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게 정말 자유로움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닌 지적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판단하는 일을 그쳐 ‘무념’,‘무상’,‘무주’, 즉 분별심을
떠난 중도의 시각을 지녀야 합니다


정말 자유로우려면 무주해야 합니다. 몸이 막 움직인다고 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어디에 있어도 무주일 수 있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해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늘 머뭅니다. 어떤 일을 해놓고도 ‘내’가 했다고 집착하지요. 친구를 도와준 후에는 ‘내’가 친구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죠. 하지만 ‘내가 도와줬다’는 마음에 머물면 그 친구의 행동을 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만 서운하게 굴면 ‘내가 예전에 도와줬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며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화를 냅니다. 이게 정말 잘 사는 건가요? 자식을 키우는 일만 해도 그래요. 부모는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일 뿐 대리인이 아니에요.
 
그런데 너무 집착합니다. 어디 자식뿐인가요? 손자가 생기면 자기 삶은 어디로 가버리고 온통 손자 생각뿐입니다. 그게 바로 머무는 거잖아요. 아이에게 온통 내 모습을 투영하는 것은 집착, 머무는 것입니다.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아이가 초등학생 때는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중학생 되면서 성적이 자꾸 떨어져요. 어머니는 아이에게 끝없이 요구합니다. 학원 보내고 과외시키면서 좋은 성적 내라고 몰아댑니다. 이 어머니 머릿속에는 초등학생 때인 아들이 박혀 있는 거죠.

지금 아이가 관심이 있는 것이 무엇이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도통 보려 하질 않습니다. 머물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유로우려면 무주해야 합니다. 우린 조사어록이나 부처님 법문을 들으며 옛날이야기라 여기고는 현재에 대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좋은 것들을 뒷전으로 밀쳐두고 다른 것만 연구하지요. 하지만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하는 연구는 하면 할수록 얽히고 복잡해집니다. 관념 속에서만 ‘화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분석하면 방법과 이론만 수십 가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미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셨잖아요. 그 후로도 수많은 스님들께서 조사어록을 통해 다 밝혀주셨잖아요. 바야흐로 통합·통섭의 시대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말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 안에, 모두 수용하고 완전한 지혜로 바라보는 최고의 방법이 있는데 왜 귀 기울이지 않나요? 이제 채택해야죠. 수행해야죠. 함께해야죠. 무념, 무상, 무주하는 방법을 늘 생활 속에서 적용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입니다.

미황사에는 높이가 12m에 폭이 5m인 괘불탱화가 있어요. 그 지역 사람들에겐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지요. 가령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거나, 한 번 참배하면 소원이 성취되고 세 번 참배하면 극락왕생을 한다는 둥 고래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되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그래서 법당 뒤에 족자처럼 말려 있던 괘불을 마당에 걸어 공양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불전함 놔두고 돈 걷는 식이 아니라, 자기가 정성껏 부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공양하는 식으로요. 쌀농사를 지었다면 곱게 빻은 쌀을 올리고, 콩 농사를 지은 사람은 콩을 올리기도 합니다.

또 초등학생들은 자기가 받은 상장을 공양하기도 하지요. 도시에서 책을 쓴 사람이 찾아와 자기가 쓴 책을 올린 적도 있습니다. 자기가 1년 동안 거둬들인 성과물을 올리는 겁니다. 마음을 올리는 거죠. 이러니 사람들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집니다.

농사지을 때 한숨만 푹푹 쉬면서 투덜대던 사람이 그 쌀을 부처님께 올릴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 ‘올해도 농사 잘 지어서 미황사 부처님께 올릴 거야’ 하고 마음먹게 되지요. 자기가 하는 일을 진지하게 바라봄으로써 자기 삶을 소중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처럼 진실하게 자기 삶을 가꾸는 것이 바로 진정한 공양이지요. 이것이 바로 나눔이자 보시입니다.

1년 전에 전국에서 저와 비슷한 연배의 스님 50명이 모였습니다. 앞으로의 한국 불교를 준비하자는 취지에서였지요. 그동안에는 각 지역에서 각자 포교하고 수행도 했지만 이젠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무소유 정신을 다시 한 번 내보여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래서 모임 이름도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우리 모임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을 걸었습니다. 생명 공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세상에서 온 몸이니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또 개인 재산을 종단에 헌납한다는 유언장도 쓰게 했습니다. 스님이니 재산도 별로 없지만, 사후에 개인 재산이 남았다면 종단의 복지나 교육기금으로 환원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출가를 할 때부터 승려는 공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살려고 출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세상 모든 것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출가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기 혼자만의 삶이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게 하나라도 있다면 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적인 게 아예 없는 것이 바로 무아 아닙니까.

21세기 한국 불교도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만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무념, 무주, 무상에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수행해서 그동안의 사고를 깨달음의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조사들의 가르침을 늘 생생하게 구현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여러분 모두 ‘내’가 없는, 늘 소통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http://kbpf.org/new/culture_view.php?gr_chr=B&rtb_idx=57&tb_idx=1945&ym=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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