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02
밝은 세상 우애를 꿈꾸는 개똥벌레 (2) - 삶이 보이는 창
 글쓴이 : 정혜주
조회 : 1,848  

밝은 세상 우애를 꿈꾸는 개똥벌레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님

'역사'라는 호랑이 등에 타다

그가 광주항쟁의 시민군이자 도청의 지도부였다는 사실은 이외였어요. 그는 어떻게 그
현장에 있게 되었던 걸까요?
"80년 5월 19일에 함평 고구마 사건 2주기 전국농민활동가 대회가 광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어요. 7천여 명 정도가 모였는데, 18일에 공수부대가 시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
어진 거예요. 당시 카농(카톨릭농민회)집행부와 농민운동 지도부는 조직보존 논리를 내세
우며 피신을 결정했어요. 하지만 나는 거기에 반발하고 몇몇 후배들과 함께 항쟁에 참여
했지요. 5·18 직전에 지도부가 대부분 사전 검거되거나 도피한 상태여서 당시 도청에는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 뿐이였어요. 23일 도청에 새 지도부가 구성될 때 나는 대외연락과
홍보를 맡았지요. 내가 가장 연장자인 데다가 운동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직편재와 지
도부 보호까지 맡았어요."
'역사'라는 호랑이 등에 탄 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호
랑이의 두 귀를 움켜쥐고 달리는 길을 선택했어요. 광주항쟁의 10일간. 저는 새삼스럽게 그
장면들을 재현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가 체험한 '해방'의 실감에 대해서는 꼭 말해야 할
것 같네요.
"광주 제일교회 앞에 병신거지가 한 명 있었어요. 표정이나 행동이 찌그리고 모지라져서
영락없는 반편이었지요. 근데 그 애가 해방 기간에 어디서 구했는지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불면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그렇게 똑 부러지게 잘 할 수가 없어요. 병원 앞에서 헌혈하는
사람들을 줄세우고 질서를 잡는 아이들이 전부 그런 애들이었어요. 그 애들의 희열에 찬
표정. 그 신명난 몸짓들. 아! 해방이란 저렇게, 찌들리고 구겨졌던 것이 활짝 펴지는 것이
구나! 실감했죠. 개안(開眼)이랄까. 거듭남이랄까. 이게 바로 혁명이구나…."
그는 이 대목에서 감회에 젖은 듯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당시 지도자
들에게 느꼈던 실망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생사가 교차하는 상황이니 만큼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지식인들, 비굴함과 뻔뻔함. 반면에 정의감, 의연함, 죽음까지도 넘
어서는 헌신성을 보았지요.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은 대부분 밑바닥 민중의 것이었어요."
그에게 듣는 광주항쟁은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것보다도 힘차고 걸판진 것이었지만,
저는 그가 어떻게 도청에서 살아남았고 광주를 빠져 나왔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
니다.
"26일 저녁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제보가 있었지요. 새벽 2시에 광주시 외곽 네 방향으
로 계엄군이 밀고 온다는 급보가 왔어요. 긴급회의를 열었지요. 죽기를 무릅쓰고 항전하자.
학생들과 여성들은 내보내자. 살아남아서 증언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내용이 결정되
었어요. 당시 도청을 중심ㅇ로 YMCA 건물에는 청소년들과 총을 못 들 만큼 부상당한 사
람이 있었고, 그 맞은편 YWCA 건물에는 생활요원들과 의료안내 요원들, 주로 여성들이
많았어요. 그들을 피신시킬 사람으로 내가 선정되었어요. 나이가 가장 많고 경험이 풍부한
데다가 사회운동을 오래 한 덕분에 아는 얼굴이 많아서 믿고 통과시킬 수 있다는 장점 때
문이었죠. 그들을 무사히 피신시키고 돌아오는데 도청이 무너지고 있더군요. 주변 건물
옥상에는 총경들이 배치해서 움직이고 물체는 무조건 쏘아대고요. 주택가 히말라야시이다
소나무에 올라가서 밤새 숨어 있었어요. 새벽에 개인집 담장을 넘어서 변소에 숨었지요.
아침에 아주머니가 밥하러 나왔다가 발견하고 들어오라고 하대요. 세수하고 머리를 감으
라고 하더니 갈아 입을 옷을 주더군요. 손톱 발톱을 깍고, 콜드크림을 줘서 지워지지 않은
손톱 때까지 닦았어요. 아침밥을 해주는데 도저히 넘기지를 못하자 달걀과 우유를 주더
군요. 그걸 먹고나자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내가 해줄 것은 다 해주었다. 이제는 당신 운에
맡긴다, 하더군요."
그 집에서 나온 이후 사나흘 동안 그가 광주의 봉쇄망을 뚫고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아슬아슬하고 박진감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통행증이 없어서 군
인들에게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벗어나고, 특전사를 따돌리고 화순으로 빠져나와서, 다시
순천과 부산으로, 부산에서 야간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떨어진 것이 30일 새벽이었다고
해요. 그는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의 작가인 이철용씨가 사는 삼양동
으로 갔답니다.
"혹시 몰라서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를 살피고 있는데, 골목에서 콘트롤데
이타에서 해고된 여성 노동자를 마주쳤지요. 그 애가, 아직 여기는 괜찮다. 들어오라고 해서
철용이 형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기서 황석영 형이랑 노동운동, 학생운동 출신들이 모여서
광주사태를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고 있더군요."
항쟁의 현장에서 막 빠져 나온 그들 동지들이 감동적으로 반겼으리라는 건 두말할 나
위가 없겠지요. 이후 그는 신길동에 있는 수녀원과 소설가 윤정모씨 집, 이장화 감독과 그
동생인 영화배우 이영호씨 집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답니다. 나중에는 허병섭 목사가
삼양동에 방을 얻어줘서 그곳에 피신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무작정 숨어 있었던 것만을
아니랍니다.
"녹음테이프를 만들어서 독일로 내보내자고 해서 녹음을 했는데, 테이프가 발각되는
바람에 수녀님들이 고초를 당하고 결국 실패했지요. 그래서 직접 증언하는 길을 선택했
지요. 비밀리에 전국의 교회와 대학 등을 돌아다니며 증언을 했어요. 내가 선량하게 생긴
데다가 또 겁 없이 돌아다녀서인지 한번도 검문을 안 하더군요. 이화여대에 들어갔을 때는
여장을 하고 후문으로 나왔지요.
6월 초순경에 성남 주민교회에서 첫 증언을 했는데, 그때 청년회 회원 중에 군대를 갓
제대하고 나온 청년이, 그럴 리가 없다. 당신 거짓말로 우릴 선동하는 것이다, 하면서 항
의와 질문을 퍼붓더군요. 지금이라도 광주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청년이 정말 광주로 갔던가 봐요. 이미 시체도 간 곳 없고 거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
지만, 그는 병원에 남아있는 수많은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그들의 증언을 들었다고 해요.
돌아온 그 청년을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써서 이대 앞에서 뿌리고 분신
자살을 하지요. 그가 바로 박종태 열사입니다. 나는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는데, 무척
괴롭더군요. 내가 젊을 목숨을 분신으로 내몰았나 해서…. 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한 김의기
열사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업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이 즈음에서 그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해졌습니다. 손톱 같은 초승달은 달마
산을 훌쩍 뛰어올라 어느 새 진도 바다 쪽으로 빠져들고 있었어요. 좋은 대화는 진한 차와
같아서 지나치면 심신이 탈진하게 되지요. 하물며 '광주' 라는 거대한 역사와 그 수레바퀴에
낀 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임에랴.
방에 들어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스무 살 시절 처음으로 광주항쟁문건을 읽고
충격과 분노로 전율했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비애였어요. 화석화되어 가는 역사와 여
전히 아픈 영혼들, 상처를 치유할 길도, 돌이킬 수도 없는 단 한번뿐인 인생들…. 하지만
창호지에 파르스름한 새벽이 비쳐들 즈음엔 새털처럼 작은 기쁨이 살풋 스쳤던 것도 같
아요. 그래요. 저는 해남땅 붉은 황토속에서 검은 진주를 발견한 거예요.

윤기현을 잡아들이면 민란이 난다

늦잠을 자서 점심 공양 시간도 한참 지난 오후에 일어나 보니, 동화처사는 대웅전 앞
약수터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더군요. 촌색시 같은 그 눈웃음을 마주보자닌, 약수처럼
새로운 호기심이 솟아났어요. 부도밭 가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저는 남은 이야기를 졸랐습
니다.
"1년 정도 지나자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도피생활을 할 수가 없더군요. 해남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모내기 날을 선택해서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었어요. 곧바로 해남경찰서에 잡혀가서 광주 경찰서로 넘겨지고, 유치장과 보안대를 오
가며 조사를 받았지요. 뒤란 대숲에 숨어있었다. 1년 동안 산과 집을 몰래 넘나들며 살았
다고 무조건 우겼지요. 숨겨준 사람들을 철저히 보호해야 하는데, 누구 이름을 불고 누구는
감추고 할 수가 없잖아요. 처음 일주일간은 두들겨 패더니 그 후에는 비교적 쉽게 넘어가
대요. 논물 묻은 잠뱅이를 입고 일하다가 잡혀온 모습이 신뢰감을 준 것 같아요. 47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나가라고 해서 나왔지요. 그걸로 사건이 종결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13년 6개월 간이나 미제 처리 상태로 놔두었더군요. 아마 언젠가는 큰 사건으로 다시 엮어
넣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1994년에 윤한봉 등 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13명이 풀릴
때에야 나도 수배가 해제되었지요."
아무튼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을 했답니다. 83년에는 여덟
살이나 어린 학생운동 출신여성과 결혼도 했고요.
"덕성여대 총학생장을 했던 사람인데 감방 살고 나와서 후배들과 농활을 준비하다가
나를 만났지요. 그 시절에 연애랄게 있나요? 여섯 번인가 만나고 결혼했어요. 아내는 여
성농민회를 조직하고, 나는 서울의 전국농민운동연맹 본부에서 일하느라 서로 떨어져 산
기간이 더 많았지요."
8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수세싸움, 농산물 제값 받기 운동, 농가부채탕감
운동, 미국 소 수입 반대 싸움 등, 8~90년대 농민운동사를 수놓았던 중요한 싸움들에서
그는 늘 맨 앞에 있었답니다. 86년 최초로 미대사관에 진입했던 미국 소 수입 반대 싸움,
죽창을 들고 농협청사를 검거했던 88년 11월의 여의도 농민대회, 그 기세롤 밀어붙인 전
국농민운동연맹의 결성, 90년대 들어서 우르과이라운드 반대 싸움 등…. 전농의 1기 투쟁
국장과 전남도연맹 사무국장, 부의장 등을 지내는 동안, 감방에도 자주 들락거렸다는 제
물음에 그의 대답이 길어졌습니다.
"나는 광주학생 관련자라서 안기부에 내 담당이 있었지요. 큰 도둑놈은 잡법취급은 안
한다고, 언젠가는 큰 사건으로 써먹으려 했던지, 웬만한 사건에서는 늘 빼주더군요. 한번은
내가 농민 대회 건으로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도지사가 윤기현을 잡아넣으면 민란이 난다고
검찰에 전화해서 풀려난 적도 있었어요."
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다가 정치계로 뛰어들어 현재는 전남 도의원이 된 부인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저물더군요. 저녁 공양을 마치고 각자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즈음에서
대화를 중단하지 않으면 그날 밤도 꼬박 샐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미 제 소설은 물 건
너갔습니다. 그의 삶이 흘러 넘쳐와서, 제가 애써 짓고있던 가상의 성체가 희미해져 버렸
어요. 저는 며칠 동안 하릴없이 절 밥을 축내면서, 방안을 뒹글뒹글 그의 동화책을 읽으며
지냈어요.
80년대에 그는 『서울로 간 허수아비』외에도 농민운동을 하는 틈틈이 몇 권의 동화
책을 더 냈더군요. 『어리석은 독재자』는 87년 4·13 호헌조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필화사건을 일으킨 작품이지요. 『오늘의 아모스』는 문익환 목사님과 생활성서에
번갈아 가며 연재하던 글을 따로 모아서 출간한 것이구요. 계백장군 등 몇 권의 위인전과
농민의 삶을 구술하고 채록하는 민중자서전, 놀랍게도 그는 『농민운동과 농민문학』이라는
평론집까지 냈더라구요. 90년대 초반에는 판금된 책들을 재출간하고 『회초리와 훈장』이
라는 새 동화책을 냈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 10년 가까이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더군요. 그
기간에 그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동화가 있어서 행복하다

"92년에 전농에서 수익사업으로 경제협동사업단을 만들었지요. 그 단장을 맡아서 사업을
진행을 했는데 97년 아이엠에프에 부도를 맞고 말았어요. 6억 빚을 졌는데, 조직에 빚을
지울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내가 그 빚을 짊어지고 나왔지요. 이제 반쯤 갚은 것 같
네요."
조직을 깰 수가 없어서 그 많은 빚을 혼자 짊어지고 나왔다니! 한숨을 내쉬는데, 그가
싱긋 웃으며 덧붙이더군요.
"덕분에 다시 동화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몇 달 전에 나온 동화책 『보리타작 하는 날』을 주셨어요. 그 책을 읽다보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이 들면서 시대에 뒤처지고 점차 권위적인 태도만 늘어가는 운동권의
몇몇 어른들에 비하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요.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전업적인 동
화작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거예요.
선생님 떄문에 리듬이 깨져서 소설이 안 써져요! 제가 투덜거리 때마다 그는, 나도 옆
방에 젊은 처자가 있어서 글이 안 되는디! 엄살을 부리곤 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그는
매일 같이 원고 할당량을 다 채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랫동안 노동이 몸에 밴 사람 특
유의 절도와 집중력이었지요. 꼭두새벽에 일어나 스님들과 함께 아침 공양을 들고,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 저녁 예불예불에 꼭 참여하는 그에 비하면, 예불에도 건성이고 낮밤을
거꾸로 사는 '소설보살'은 기가 죽을 수 밖에요. 처음에 '글쓰는 사람은 다 밤도깨비인가
보다' 이해해주던 절 식구들이 동화처사와 저를 은근히 비교하는 눈치까지 보이니…. 결국
절에 온 지 20여일 만에 저는 노트북 컴퓨터를 싸들고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어요.
딸아이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사실은 달마산 정기(精氣)와 해남땅이 문체(文綵)를 빨아
당기는 기 싸움에서 밀린 거지요.

서울, 판타지와 애니매이션의 거리에서

지프차로 해남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주고 한사코 차표까지 끊어주시는 배웅을 받고
헤어진 지 3년 만에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새롭게 둥지를 튼 <어린이문학 <BR>협의회> 사무실이 제 집 근처인 서대문에 자리잡은 덕분이었지요.
"책 출간 때문에 종종 올라오다가, 이곳에 할 일이 많아서 한 몇 년 눌러 앉을 작정이
예요. 운동했던 사람은 어디가나 일이 먼저 보인다니까요."
그는 월간 『어린이 문학』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고 했어요. 해남에 계실 때 그는 저
혼자만 아는 보석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 올라오신 그는 이오덕, 권정생 선생님과 더불어
동화계의 원로계이십니다.
"옛 이야기가 신식교육 이후에 거의 없어졌지요. 유아그림책의 98%가 외국 수입이예요.
게다가 젊은 사람들이 판타지 동화에만 휩쓸리는 분위기도 걱정이구요."
동화계의 근황에 대해서 화제가 미치자 그는 갑자기 다변이 되었어요. 작품만이 아니라
삶까지 봐야 한다. 독재정권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건 작품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세련된
문화주의'에 반대한다. 동화계의 우먼파워는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가족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있다. 문제의식이 좀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 그가 둥지를 튼 어린이문학협의회는
이를테면 한국 리얼리즘 동화의 진지(陣地)더군요. 소외된 지방의 작가들과 소중하지만
잊혀져 가는 나이든 작가들을 배려해야 한다. 후진을 양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출판사를
내야 하지 않을까. 동화 창작과 동화 운동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 그런 말들을 듣다
보니 문득 일은 그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광화문 시네큐브에 가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함께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자 광화문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지요. 신촌으로 가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아트
박스처럼 예쁘게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조명등 아래서 해
남의 검은 진주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문장에 약했어요. 좀 거칠었죠. 이제야 보여요. 내가 지난 30년 동안 운
동을 하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역사의식, 세상을 바라보는 눈인데….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서 요즘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판타지? 나도 자신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서구적인 판타지에 대항하는 역사 판타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달걀밥 해먹기』를 출간하고 올 봄에 『연꽃이 된 바다』를 낸 그는 가을에 출
간될 『어린이 농가월령가』12권을 포함해서 내년까지 22권을 낼 예정이라는군요. 22권
이라니! 생산력이 형편없이 낮은 '소설보살'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수 밖에요.

마음은 소년, 외모는 청년?

며칠 전 인터뷰를 위해서 그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친한 사람을 인터뷰한다는 것이 새
삼스러워서 딸아이를 데리고 놀이 삼아 갔지요. 동화책만 있으면 엄마 얼굴도 안 쳐다보는
딸애를 사무실에 풀어놓고 인터뷰는 보충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농민운동
가와 동화작가로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고 이제는 보다 풍부하고 성숙한 문화적 갈무리를
남겨 놓은 그에게 인생에서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
더니 입을 열더군요.
"이 사회에서 무학(無學)자로, 독학자(獨學者)로 산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에요. 학맥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 윤기현은 패거리문화에서는 늘 아웃사이더죠. 주류사회에 정서적 동화가
쉽지 않고, 아직도 이질감을 느껴요. 내가 이러할진데, 나도다 못 가진 후배들을 생각하면
참 까마득하다! 절망감이 느껴져요."
그러면서 그는 한가지 예를 들더군요. "광주항쟁의 기록화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학맥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공적인 기록에서 거의 빠졌어요.
사건 직후에도 구두닦이, 철가방도 못하고 무척 힘든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지요. 밑바닥
출신들의 기록이 보강되어야 해요."
자연스럽게 그가 앞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로 화제가 넘어갔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니 내가 아니라도 꼭 했으면 하는 일이, 운동사에서 학
맥이 없어서 잊혀지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이에요. 아니 더 넓
혀서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 민중 자서전 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참, 지남
30년간 농민운동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도 있죠. 또… 우리 안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해요.
내년쯤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운동권의 자기 정화를 위해서 문제제기를 해볼까 하
는데…."
그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선생님은 아직도 일 욕심이 너무 많으세요! 했더니,
그가 싱긋 웃으며 덧붙이더군요.
"한 가지 더 있어요! 즐겁게 사는 거! 슬슬 연애도 해보고 싶은데, 늙은탱이라고 볼
라나?"
그 순간 동화책에 코를 박고 있던 딸애가 눈을 반짝 뜨며 하는 말.
"선생님 마음은 소년이시잖아요… 외모는… 청년이시구요!"
아이고! 에미보다 한 술 더 뜨는구나! 하지만 속없는 늙은탱이는 아이의 아부성 발언에
좋아라 해벌쭉 웃습니다. 둘이 장단 맞춰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시탐탐 탈주를 꿈꾸는
불성실한 엄마는, 옳다! 가끔은 애를 맡겨도 되겠구나! 내심 쾌재를 부르는데, 그 속을 알리
없는 그는 터프한 남자애와 귀여운 남자애 사이에서 누굴 선택할지 모르겠다는 꼬마숙녀의
고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대여, 온종일 봄비 내립니다. 어디선가 외로운 개똥벌레 한 마리 실눈을 뜨고 젖고
있네요. 개똥벌레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쯤 다가와 있는 걸까요. 벌써, 들리나요? 봄비를
머금고 삼라만상, 뭇 생령들이 약동하는 소리가, 우리네 삶도 문학도 그 눈부신 운동 속에
있음을 믿어요. 삶과 문학과 운동을 한데 아우르는 사람, 그런 분이 가까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우연인 듯 인연인 듯 어느 술자리에선가 마주친다면 술 한 잔 가득
따라 올리세요. 그대 손금에 새겨진 눈물의 지도, 내 안에도 있어요. 눈물의 강을 박차고
반딧불이 환하게 날아오를 날, 꼭 있을 거예요.

『삶이 보이는 창』2003년 4·5월호 <사람 사람들> 中
정혜주 - 소설가, 『창』기획위원의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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