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13
[월간 산]우리네 삶이 출렁이는 한, 땅끝 같은 것은 없다
 글쓴이 : 윤제학
조회 : 1,921  


해남 땅끝마을에서 떠올린 한 생각입니다. 땅끝은 더 이상 갈 데 없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출렁이는 바다를 따라 내 마음도 출렁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먼 바다로 배를 띄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로, 하나도 바쁠 것 없어 보이는 배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파도속에 또 작은 파도를 일으키는 항적(航跡)을 좇았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는
보길도에 닿았겠지요. 시간이 허락 되지 않아서 고산(孤山)윤선도
(尹善道 ․ 1587-1671)의 시정(詩情)이 서린 부용동(芙蓉洞)을 거닐어 보는 일은
뱃길을 보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습니다.

변죽이 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토 최남단의 절 미황사(美黃寺)에 가서
땅끝을 밟아보지 않을 수 없었고, 땅끝에서 윤고산의 보길도를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美)”하고 소가 울부짖으며 죽은 자리
호남정맥의 가지줄기에 자리잡은 달마산(489m)의 서쪽 기슭에 안긴 절 미황사.
하루해를 바쳐 달려갔건만, 달마산은 구름에 지워져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절 마당엔 안개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순간 구름이 비켜서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달마산을 되살려 놓습니다. 기묘한 암릉은 병풍을 펼친듯하고,
절집은 땀땀이 온 정성을 기울여 수놓은 그림이 됩니다.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여러개의 단을 만들어 앉힌 전각들은,
제각기 높낮이를 달리 하며 달마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 시각적인 조화는 청각까지 공명하게 하니, 절정의 피아니스트가 날렵하게
건반을 오르내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을 그대로 받으려면,
대웅전을 약간 오른쪽에 둔 위치에서 보제루에 등을 기대면 됩니다.
구름에 지워졌다 다시 살아나고 또 사라지는 달마산은,
달마 스님의 마지막 해적을 연상시킵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가 되는 달마 스님은
그 명성에 걸맞게 독살을 당하는 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덤 속에 썩어 문드러질 육신 대신
신발 한 짝만을 남깁니다. 그 얼마 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오던 송운(宋雲)은
인도로 돌아가는 달마 스님을 만납니다.
물론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지만, 큰 사람의 뒷모습답지 않습니까.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인물들의 마지막이 다 그렇습니다.
석가는 죽은 뒤 7일째 되던 날, 뒤늦게 도착한 제자 가섭이 관을 세 바퀴 돌자
과속에서 두 발을 내 보입니다. 예수도 죽은지 삼일 후 부활합니다.
이 세 죽음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종교적․학문적 해석은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지라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삶도 죽음도 한없이 버거운 존재자들의 불안, 혹은 살아남은 자의
지극한 슬픔이 불멸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1692년에 세워진 미황사 사적비에는 창건의 내력을 소상히 전하는데,
간략히 줄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돌로 만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나타났는데,
배 안아서 부처를 찬탄하는 노랫소리가 퍼져나왔다.
어부들이 살펴보고자 다가갈 때마다 배는 사라졌다.
이에 의조(義照) 스님이 제자와 100명의 화랑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돌배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주조된 금인(金人)이 노(櫓)를 들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과 법화경, 비로자나․문수․보현․10성중․53선지식․16나한
등이 그려진 탱화, 그리고 쇠고리와 검은 돌이 실려 있었다.
이를 바닷가에 내려 어디에 모실지를 의논하는 순간 검은 돌이 갈라지면서
암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국(宇國)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돌며 이 경과 상(像)들을 모실 곳을 찾았다.
그런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一萬佛)이 현현하였기에
여기에 머물기로 하였다. 경을 싣고 가다가 누웠다 일어나 앉는 곳에 모셔라’
이에 의조 스님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잘 가던 소가 한번 누웠다 일어나 산골자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 하고 울부짖으며 죽어버렸다. 이에 의조 시님이 소가 누웠던 곳에 절을 지어
통효사라 했고, 소가 죽은 골짜기에 절을 지어
경전과 신상을 모시고 미황사(美黃寺)라 했다.
여기서 ‘미’는 소의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의 색을 취한 것이다.
(미황사 응진당 수리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을 읽기 쉽게 고쳤음)
동국여지승람에도 이와 유사한 얘기가 전하는데,
여기서는 금인 대신 중국 남송의 고관이 등장하여
달마산에 깊은 공경의 예를 올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을 달마대사가 늘 머무를 땅이다.:”

무지렁이들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싱싱한 종교

미황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시각을 중첩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가람 전체와 자연을 한눈에 담아야 합니다.
앞서 얘기 했듯이 달마산과 전각 전체를 은 시각으로 두루 살핀 다음,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응진당에서 남해 바다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 바다는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그럼 바다가 아닙니다.
길게 다리를 뻗은 산자락이 바다를 만나기도 전에 안개가 먼저 퍼질러 앉아 버리는,
썰물 때면 아낙들이 삶을 건져올리는 그런 바다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진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선명히 떠 있기도 하지만,
설핏 호수 같은 얼굴만 보여주기도 하는 바다입니다.
금강스님(주지)으로는 일몰은 장관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욕이 될 것 같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도량 주변을 어슬렁거려 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동백이 눈에 띌 것입니다.
11월 말부터 3월까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이곳의 동백꽃은
작고도 소담스럽습니다. 특히 참나무슾 사이에서 자라는 동백은
짙푸르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잎 사이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꽃을 피어 올립니다.
반쯤은 양지, 반쯤은 음지에서 자라기 때문이랍니다.
적절한 결핍의 미덕입니다. 1~2월 중 그곳에서 행운을 만난다면
하얀 눈을 가슴에 저민 설동백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절집을 살피는 눈길은 세심할수록 좋습니다.
적어도 미황사에서 전각을 살필 때는 손길로 쓰다듬듯 해야 합니다.
먼저 단청을 다 내려놓은 대웅보전(보물 제 947호)이 눈길을 끕니다.
죽어서도 반듯하게 살아가는 나뭇결과 숨결을 나눈 다음에 더 아래를 살펴야 합니다.
거기, 살아 숨쉬는 돌이 있습니다.
자연석을 다듬은 주춧돌에는 연꽃이 피어나고 게와 거북이 꿈틀거립니다.
이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석수장이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안기는‘위대한 작자 미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해 문맹이 되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을까도 싶습니다.
무지렁이들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싱싱한 종교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를 두고 민간 신앙과 불교의 습합이니,
불교의 남방 전래를 상징하느니 하는 얘기는 학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산이 좋아 절을 찾고 절이 좋아 산을 찾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언사일 것 같습니다.
이밖에 주요 전각과 문화재로는
응진당(보물 제 1183호), 괘불탱화(보물 제 1342호), 명부전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제루를 복원하는 등 절의 모습을 일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미황사 순례의 정점은 옛 통교사가 있던 곳에 자리한 부도들입니다.
부도들 마다 거북, 게, 두꺼비, 연꽃, 새, 물고기, 도깨비들이 새겨져있습니다.
죽음을 살아낸 사람들의 무덤에서나 어울릴 장엄입니다.
서서 죽은 사람들이 표정입니다. 삶의 매무새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남 땅끝마을, 달마산 미황사. 근거없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도 좋을 곳이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글 윤제학(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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