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15
봄바람에 실려온 땅끝마을 천년고찰의 향기
 글쓴이 : 미황사
조회 : 1,878  


(한화그룹 사보. 한화 한화인에 실린 글입니다)

성큼 찾아온 봄 따라 발길 내 닿은 곳은‘이 땅의 끝’하고도,
병풍 같은 달마산의 품에 앉아 남해바다와 진도를 펼쳐 놓은 아름다운 절, 미황사…
절집 마당서 깊은 숨을 쉬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바람이 구름 한 자락을 가져왔다 가져갔다 노닐고 있다.

동서남북은 어느 각도를 잡고 보아도한폭의 풍경화다. 앞에는 동백나무가 뒤에는 북가시나무가 사철 푸르게 미황사의 든든한담인양펼쳐져있다.쪼로록귀에만들리던새소리도어느새포물선이되어그려진다.

하나 하나 전각을 돌아보며 만나는 미황사의 주지스님이신 금강스님은‘주지스님’은 말 붙이기도 무서운 노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을 털어준다. 금강스님은 아이 같이 맑은 표정으로“한문은 부모들한테 던지는 미끼고, 나는 여름, 겨울로 아이들이랑 노니까 얼마나 좋아.”하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TV와 컴퓨터게임이 없는 산사에서 이틀째를 지나면 아이들은 또래들과 더불어 자연과 노는 법을 스스로 찾는다고 한다.

땅끝, 그 이름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었다. 하지만“친구 손 잡고 오시면 빨리 오실 수 있습니다.”라고 적힌 미황사 홈페이지의‘미황사에 빨리 오시는 방법’이라는 글에 빙그레 도는 미소와 함께 기꺼이 땅끝을 찾아 나설 마음을 심는다. ‘땅끝’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구비구비 남도 길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주변의 다른 산들과는 다른 상서로운 산을 만났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달마산’이었다.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인연을 다하고 그 후의 행적을 알수 없었는데 그 동쪽인 한국과 일본에서 유일하게 달마의 이름을 딴 지명이 달마산이라 하여, 달마대사가 이 곳 달마산에 이르러 기거하지 않았을까하는 추론도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시대에 많은 중국인들이 달마산을 달마대사의 상주처로 참배하였다고 전해진다. 481m밖에 안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 기운은 달마대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마음으로 즈려 보아야 보인다는 새침떼기 동백이 먼저 반겨오는 그 산의 허리에 미황사가 있다. 신라 경덕왕 8년 (749년)에 의조화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니 천년 고찰이라는 말도 부족함이 있다.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닿았고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
을 꾸었는데 금인(�人)이 말하기를“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사찰을 창건하니 미황사의‘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창건 연기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미황사의 첫번째 아름다움으로 꼽는다는 대웅보전(보물 947호)은 응진당(보물 1183호)과 함께 한국의 사찰건축이 예술 그 자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팔작지붕은 하늘을 날 듯 날렵하고 빛바랜 단청은 세월을 머금었다. 보길도 앞바다에 3년을 담가두었던 나무라는 아름드리 기둥의 나뭇결은 살포시 대어본 손바닥에 깊은 심상을 남긴다. 미황사 대웅보전은 삼배만 해도 삼천배가 되어 소원 하나는 이루고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장에 그려진 천개의 부처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마당에서는 진돗개‘백운이’가 미황사를 찾은 모든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표정을 던지며 유유히 걸어 다닌다. 백운이는 3년 전쯤 달마산을 돌아다니다가 올무에 걸렸는데 올무를 끊고 미황사를 찾아 들어왔다고 한다. 스님들이 목포에 있는 동물병원까지 데려가서 대수술을 해서 살려낸 생명이니 백운이라고 왜 그 은혜를 모르겠는가.

미황사에서 남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부도암을 만난다. 예로부터 많은 스님들이 참선수행 하시던 도량임을 증명하듯 스님들의사리를 모신 부도가 21기나 모셔져 있다. 부도밭 옆에 지은 암자는 죽음 또한 담담한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수행자들의 뜻이 담긴 것이었을
까. 서쪽으로 다시 6기의 부도가 있는데 죽음을 연결 짓는 상징물이건만 푸근한 재치가 느껴진다. 게, 원숭이, 물고기, 도마뱀 같은 조각이 스님들의 맑은 웃음을 닮았다.
미황사는 가을밤 산사음악회와 어린이 한문서당으로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화려하고 유명한 출연진의 음악회는 아니지만 미황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동잔치가 되는 산사음악회에는 매년 1천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랫마을서 들놀이 하는 분들도 오고,
주변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와서 가곡을 부르기도 한다. 튼튼한 상자들을 뒤집어 놓고 합판을 깔아 만드는 작은 무대는 미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함이 없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는 50명의 아이들이 7박 8일간 미황사에서 먹고 자며 한문을 배운다. 10시에 자고 4시에 기상하고, 참선과 다도를 배우고 절 마당에서 맘껏 뛰어 논다. 한번왔던 아이들이 다시 오고싶어 하다보니 항상 경쟁률이 높다. 부모가보내고 싶다고 억지로 보낼 수 없는 방법으로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미황사 홈페이지를 주시해 볼만하다.
미황사의 주지스님이신 금강스님은‘주지스님’은 말 붙이기도 무서운 노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을 털어준다. 금강스님은 아이 같이맑은 표정으로“한문은 부모들한테 던지는 미끼고, 나는 여름, 겨울로 아이들이랑 노니까 얼마나 좋아.”하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TV와 컴퓨터게임이 없는 산사에서 이틀째를 지나면 아이들은 또래들과 더불어 자연과 노는 법을 스스로 찾는다고 한다. 약속된 일주일이 다 되면 아이들은 녹차의 향기와 맛을 알게 되어서 집에 가서도 과자보다는 다구를 찾는다고 하니, 팍팍한 도시 속에 가두어 두고 컴퓨터게임만 한
다고 아이들을 혼 내는 어른들이 어리석다.

미황사 마당에는 범종 불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름과 소원을 적어놓은 기와가 쌓여있다. 옛날 미황사에는 만 근이 넘는 범종이 있었다고 한다. 10km가 떨어진 송종리라는 마을은 미황사 종소리가 들리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큰 종이 어디로 갔을까.
미황사 아랫마을에서는 일제시대에 일본이 종을 가져갈까 염려하여 범종을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한다. 그 종을 복원하기 위해 미황사 주지스님이신 금강스님과 신도들은 천일 기도를 시작했고 3월이면 그 마지막 백일이 끝난다고 한다. 올 가을 미황사를 찾으면 오랜 기원이 담긴 그 범종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달마산과 땅끝이라는 천혜의 자연과 천년고찰의 역사 속에 자리잡은 미황사, 알고 보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 오롯이 자리잡고 사랑받는 사찰이다. 찾아 오는 사람이 누구든 형편껏 공양과 방을 내어주는 미황사는 욕심과 번뇌를 비워낸 마음 한 칸에 인정의 싹을 심어
준다. 그래서 금강스님이“촌스럽지요? 허허허”하며 소개하는 미황사 홈페이지는 항상 미황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안부와 답글들로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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