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18
사막의 오아시스-우전국
 글쓴이 : 미황사
조회 : 1,970  

('화엄경이야기'(장승-장휘옥역)라는 책에 나온 글을 옮깁니다. 우전국은 미황사의 창건 사적에 나오는 나라이름이며, 화엄경을 편집한 나라입니다)



신강(新彊)위글 자치구의 타림분지 서남쪽에 있는 화전현(和田縣)은 곤륜 산맥의 북쪽과 접해있는 마을이다.
일찍이 우전현(于闐縣)이라 불렸지만 1959년에 화전현으로 개칭된 이 사막의 오아시스는 옛날 우전의 땅이다.
화전현은 곤륜산맥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백옥강과 흑옥강 유역에 있는 큰 오아시스다.
백옥강에서는 백옥이, 흑옥강에서는 흑옥이 채집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옥들은 옛부터 우전의 특산물로서 서쪽으로는 이란이나 이라크 방면에, 동쪽으로는 중국의 무역품으로 보내졌으며,
이 무역으로 인해 우전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외 비단이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깔개 등도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우전은 동서무역의 중개시장으로서 번영했기 때문에 동서 양쪽 문화를 받아드려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란계통의 조로 아스트교는 물론 불교도 수입되었다.
-북사(北史)- 제 97의 -서역전(西域傳)-에 보면,우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불법(佛法)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찰과 탑과 승려들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육재일(六 齋日)을 지키고 제단에 바칠 곡물이나 과일을 손수 씻었다고 한다.

성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찬마사(贊摩寺)라는 절이 있었다.옛날 나한의 노전이라는 비구는 이곳에 왕을위해
화분을 엎어 놓은 듯한 불탑을 만들었으며,또한 불족석위에는 부처님 양쪽 발의 족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우전의 서쪽 500리 되는 곳에 비마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은 중국 도가의 시조인 노자가 서역 사람
들을 교화하기 위해 성불한 장소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가 번청했던 옛날 우전국의 흔적은 현재 화전현의 남쪽 약 25킬로미터에 있는 옛 성의 유적지로서
남아 있다.역사책이 전하는 서역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현재 유적지에는 많은 흙무더기와 건축용 기둥이 남아있다.
성의 남쪽에는 높이가 6미터,주위가 60미터 되는 석탑이 있으며, 사방에는 진흙으로 만든 조각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석탑 근처에는 방사의 유적지가 있지만 모래로 덮혀 있다.오래 전에 여기서 진흙으로 만든 불상의
머리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방사는 사찰의 유적지임이 분명하다.1978년 겨울,이 사찰의 유적지에서 한나라시대의
화폐 저장소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서 오주전(한나라시대의 화폐이름)이 90개 정도 출토되었다고 한다.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사찰의 유적지는 『법현전』에 나오는 구마제 대사찰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사찰의 찬란함과 행상

노비구 법현이 율장의 빠진 부분을 구하기 위해 장안을 출발한 것은 진나라 융안 3년(399. 일설에는 400)이었다.그때는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오기 직전이며,『화엄경』의 번역자인 불타발타라가 장안에 들어오기 7,8년 전이었다.
법현은 혜경,도정,혜외등과 함께 계율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현재의 감숙성 서녕을 거쳐 장액을 지나 돈황에
이르렀으며, 거기서 다시 강을 건너 선선에 도착하였다.이 나라는 4000여 명의 승려가 있는 불교국으로서 소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선선에 1개월간 체류한 법현 일행은 다시 서쪽으로 15일간 여행하여 오이국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도 4000명정도의 승려가 있는 소승불교국이었다. 여기서 다시 35일간 여행하여 겨우 우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현전』은 400년 전후의 우전의 불교를 소상히 알려 주고 있다.그것에 의하면 우전은 부유한 나라로서,국민들은 불법을 신봉하고 수만명의 승려들이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었다.선선이나 오이국보다 열 배나 더 큰 대국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집 앞에는 높이가 6미터 정도되는 작은 탑이 세워져 있었으며,여행하는 승려들을 위해 위해 승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법현 일행이 온 것을 알게 된 우전의 국왕은 일행을 구마제사로 초청하여 머물게 하였다.이 사찰은 3000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사찰이었다.식사도 계율에 정해진 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기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하였으므로 이것을 본 법현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경 등 다른 세 명은 먼저 갈차국으로 출발했지만,법현은 이 나라의 불교의례에 큰 매력을 느껴 얼마 동안 더 머물기로 하였다.그 이유는 행상의 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행상이란 꽃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수레에 불상을 싣고 성 안을 천천히
행진하는 것을 말하는 데,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의 하나이다.이 행사는 인도․서역․중국으로 전해졌으며, 4월 8일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우전에서는 4월 1일부터 성 안의 도로를 청소하고 거리를 장식하였으며,왕과 왕비,시녀들이 앉을 성문 위는 큰 막을 쳐서 장엄하였다.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는 구마제사의 승려들은 왕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받고 있었으므로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서서 걸었다.행상의 수레는 성에서 3,4리쯤 떨어진 곳에서 제작되었다.수레는 바퀴는 4개,높이가 9미터 정도로서 왕이 사는 궁전처럼 크고,칠보로 장식한 깃발을 드리웠다.수레의 한가운데는 불상르 싣고 그 양 옆에는 보살상2구를 배치하였으며, 부처와
보살을 보좌하기 위해 금․은으로 만든 비천생을 궁중에 매달았다.
행상의 수레가 성문으로 100보 정도 가까이 오면 왕은 왕관을 벗고 새옷으로 갈아 입은 후,맨발로 꽃과 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성문을 나가 행상을 맞이하여, 머리를 불상의 대고 예배하고 꽃을 뿌리며 향을 피웠다.

행상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성문의 누각에 있던 왕비와 시녀들은 많은 꽃을 뿌렸는데,그 흩날림은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우전에는 14개의 대사찰이 있었으며, 한 사찰을 행상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그러므로 모두 14개 사찰의 행상이 끝나는 것은 4월14일이었다.이 14일동안 성 안에는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상의 행렬로 붐볐던 것이다.
『법현전』은 우전의 또 하나의 사찰인 왕신사에 관해서도 기록하는 있다.왕신사는 성의 서쪽으로 7,8리 되는 곳에 있으며,창건한 지 이미 80년이 되었다고 한다.3대의 왕에 걸쳐 건립된 이 사찰은 탑의 높이가 75미터나 된다고 하므로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건물은 금․은으로 칠해져 있고 여러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탑 뒤쪽에는 불당이 있는데, 그 기둥과 창문도 모두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또한 아름답게 장식된 승방도 있었다고 한다.이것으로
5세기 초에 우전의 사찰이 얼마나 장관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막을 가는 지법령과 바다를 건너는 각현

우전의 불교가 전성기였을 무렵,중국인 구도자 지법령이 대승경전을 구하기 위해 우전으로 왔다.그는 우전에 대승불교가 성행하고 대사찰이 많은 것에 놀랐다.
우전에 머물고 있던 지법령은 하나의 정보를 얻었다.그것은 이 나라의 동남쪽 20리 되는 곳에 험한 산이 있는데,그곳에 많은 대승경전이 숨겨져 있으며.더구나 그것은 나라의 관리가 지키고 있어서 국외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법령은 우전국왕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화엄경』을 중국에 전하고 싶다고 청원하였다.당시 우전국왕은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왕 스스로 대승경전을 공양하고 있었다.당시 우전국왕은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왕 스스로 대승경전을 공양하고 있었다.국왕은 지법령의 열렬한 구도정신에 감격하여 이를 허락하였다.이리하여 그는 『화엄경』의 앞부분 3만 6천 게송의 범본을 입수하여 장안으로 당당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법현과 함께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지엄은 계빈으로 갔다.거기서 계율을 지키는 승려들의 청정한 생활을 본 지엄은 자신의 나라인 중국에서의 생활을 반성하고 “중국 승려들은 도를 구하고자 하는 뜻은 있지만 진정한 스승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열 수가 없다”고 하며,계빈국의 승려들 가운데서 중국 사람들을 교화해 줄 사람을 찾았다.그러자 이구동성으로 불타발타라를 추천하였다.

그는 인도의 야가리성에서 태어났으며,석씨의 성을 이어 대대로 불교학을 존중한 사람이다.8세에 출가하여 불대선선사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았으며, 마침 이 계빈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지엄은 이 사람이야말로 중국에 가서 계율과 선법을 전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지엄의 간청을 받은 각현(중국에서는 불타발타라를 각현이라고 불렀으므로 이하 각현이라고 부른다)은 중국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그는 실크로드를 통하지 않고 해로로 중국에 가고자 하였다.총령(파미르고원 일대)을 넘는 길 외에,인도에서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현재의 네팔을 경유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고, 티벳을 거쳐 청해성을 지나 난주유하여 운남성에서 사천성으로 들어가,다시 장안이나 낙양으로 통하는 길이다.이 둘 중 어느 길을 택한다 하더라도 설산(만년설로 뒤덮힌 높은 봉우리)을 넘지 않으며 안 되므로 각현은 이 두 길을 단념한 것이다.
이에 각현은 갠지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강의 하구에서 배를 타고 당사의 통상로를 따라 항해했음이 틀림없다.버어마로 건너온 각현은 거쳐 캄보디아 도착하였으며, 거기서 다시 해로로 인도지나 반도를 따라 하노이와 광주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고 생각된다.『고승전』이 교지에 상륙했다고 하는 의미는,도중에 잠시들린 항구를 나타낸 것이거나,혹은 버어마 남부에 상륙한 후 인도지나 반도를 육로로 횡단하여 교지에 도착하고, 다시 교지에서 해로로 중국으로 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교지를 출발할 때 각현은 초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배가 어느섬 근처에 왔을 때 각현은 선장에게 이 섬에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어떠내고 물었다.선장은 이와 같은 순풍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배가 200여 리 정도 나아가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선장은 할 수 없이 배를 되돌려 조금 전의 그 섬으로 접근했다.그런데 다시 순풍이 불어 오는 것이었다.모두들 출발하자고 아우성이었지만 각현은 끝내 반대했다.순풍을 타고 먼저 출발한 배들은 모두 전복되었다.어느덧 밤이 되어 각현은 배를 출항시키자고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할 수 없이 각현은 손수 배의 밧줄을 풀어 자신이 타고 있던 배1척만 출발시켰다.그 때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해적에게 약탈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각현이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항해술에 익숙해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교지를 출발한 배는 이윽고 청주의 동래군에 도착했다.산동반도의 동주항은 예부터 동아시아 각지의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교지를 출발하여 광주에 상륙해야 할 배가 먼 산동반도까지 표류한 것이었다.법현도 마찬가지로 표류하여 산동반도의 청도부근에 있는 뇌산에 상륙하였다.

계율을 잘 지킨 각현과 파계한 구마라집

등주에 상륙한 각현은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장안으로 떠났다. 그가 장안에 도착한 것은 406년,혹은 408년경으로 추정된다.

각현이 장안에 도착하자 이미 401년에 장안에 와 있던 구마라집은 매우 기뻐하였다.서역에서 양주로 오랜 세월 동안 유랑의 여행을 계속했던 구마라집은 인도의 계빈국에 대한 최신정보를 듣고 싶어서 각현에게 접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그러나 당시 구마라집을 중심으로 하는 원래 계율을 지키고 선관을 닦는 선자였다.이에 비해서 구마라집은 여자를 가까이 한 파계승이었다.구마라집의 교단에서 볼 때 각현은 그렇게 좋아할 인물이 아니었다.구마라집 교단의 승려들은 후진의 국왕인 요흥의 권력에 아부하여 궁중에도 출입했음에 반해,각현은 궁중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홀로 고고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구마라집이나 그 교단의 사람들, 혹은 정치 권력자들로부터 이단시된 각현은 언젠가는 장안에서 추방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마침내 각현은 4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장안을 떠났다. 서역에서 귀국한 보운도 동행하였다.
이윽고 각현 일행은 여산의 혜원을 만나기 위해 여산으로 향했다.혜원은 옛 친구처럼 따뜻한게 맞아 주었다.여산에 들어간 각현은 411년에 선경을 번역하였다.

각현은 1년 정도 여산에 머문 후 산을 내려와 서쪽의 강릉으로 향했다.413년 2월,유유가 강릉에서 건강으로 돌아올 때 유유는 각현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유유와 동행한 각현은 동진의 수도 건강의 도장사로 갔다.
건강의 승려들도 각현의 고고한 인품을 좋아하며 그를 존경하였다.

지법령과 각현의 만남-60『화엄경』의 번역

우전에서 『화엄경』의 범본을 구해 장안으로 돌아온 지법령도 장안을 떠나 건강으로 갔다.각현이 도장사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지법령은 각현에게 범본『화엄경』을 중국말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요청을 받은 각현은 『화엄경』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이리하여 진나라 의희 14년(418) 3월 10일에 시작된 60『화엄경』의 번역은 원희 2년(420) 6월10일에 완성되었다.실로 2년 3개월에 걸친 힘든 번역사이었다.

다시 범본과의 대교․교정작업이 시작되어 영초 2년(421)12월 28일에 모두 끝났다.이때 받아적는 일을 맡은 사람은 법업이었는데, 그는 중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엄경』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계율을 엄격히 지키고,소승불교에 정통해 있던 법업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가르침을 설하는『화엄경』을 접하고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도장사의 승려들은 새로운 대승경전인『화엄경』의 내용을 보고 지금가지의 경전들과는 그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에 경탄했다.비로자나부처님,그것은 광명 그 자체라고 한다.그렇다면 지금까지 불교에서 설한 내용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을가
(‘광명’이라고 하는 것에는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승불교에 정통해 있던 법업은 이 놀라운 가르침의 내용을 읽고 그 요지를 정리하였다.그것이 바로 법업이 지은 『화엄지귀』2권이다.중국 사람들에게 이 경을 이해시키고 싶다는 정열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이다.그러므로 후에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은 "대교의 출발은 법업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단 것이다.

도장사의 승려들은 지금까지의 불교에서는 보지못한 경탄스러운 가르침을 설한『화엄경』의 범본을 그대로 책상 위해 놓아 두면 벌을 받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이 범본을 모실 장소를 고안하였다.그리하여 건립한 것이 화엄당이다.도장사의 한쪽 편에 세워진 화엄당에는 지법령이나 법업뿐만 아니라 도장사의 승려나 일반 신도들도 참배하였다.
사막에서 발견한 제2의『화엄경』-비로자나나한과 실차난타

400년경, 법현은 우전에서 불탑과 불당,승방이 완비된 왕신사를 보았는데,그 후 200여 년이 지나 현장도 이 절을 방문하였다.현장이 왕신사를 방문했을 때는 그 절 이름이 바뀌어 사마야사라 불리고 있었다.절 안에는 높이가 300여미터나 되는 탑이 있었으며,그 탑에서는 자주 신령스러운 서기가 나타나고 신광을 발하는 일도 있었다.
그 무렵,왕성의 남쪽10리 정도 되는 곳에 비로자나사라고 하는 큰 사찰이 있었다.이 사찰은 우전국의 선왕이 비로자나나한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한다.이 나한은 계빈국에서 들어와 삼림속에서 입정하고 있던 비구로서,왕에게 사찰을 세워 불법을 널리 알릴 것을 진언하였다.여기서 그의 이름이『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와 똑같다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7세기 전반에 우전에는 사찰이 100여 개,승려가 5000여 명 정도 있었고,400년 무렵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성행하였으며,국왕은 불법을 존경하여 스스로 비사천문의 먼후손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왕성의 서남쪽에 있는 우두산벼랑 끝의 한 사찰에 안치된 불상은 때때로 광명을 발휘하였는데,그것은 옛날에 여래사 이곳에 와서 천인을 위해 법요를 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두산에는 석실이 있었는데 멸진정에 들어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고 있는 아라한상은 수백 년이 자나도 그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이때, 당나라의 측전무후가 대승불교르 신봉하여『화엄경』의 완전한 범본을 구하고 있었다.무후는 우전에 이 경의 범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전에 사람을 보내어『화엄경』의 범본과 번역자를 구해 오게 하였다.그때 범본을 가지고 장안으로 온 사람이 실차난타(652~720)였다.

695년에 동도의 대편공사에서 번역이 시작되었다.무후는 몸소 번역장소에 나가 서문을 지었다.보리유지와 의정이 범본을 읽고,복례와 법장이 번역을 도왔다.완성된 것은 699년,불수기사에서 였다.이것이 새로 번역된80『화엄경』이다.

80『화엄경』을 60『화엄경』과 비교하면, 문장이 거침이 없고,내용도 60『화엄경』이 8회 34품인데 반해,9회 39품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704년,실차난타는 연로한 어머니를 뵙기위해 한때 우전국으로 귀국했지만,708년에 중종의 초청으로 다시 장안으로 되돌아 왔다.
710년 10월에 5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화장을 했을때 혀만 타지 않고 남지 않았으므로 그 혀를 우전으로 보냈다.
화장을 한 장안성의 북쪽 문밖에 있는 고연등대 근처에 7층 탑을 세웠는데 사람들을 이 탑을
화엄삼장탑 이라 불렀다고 한다.

『화엄경』은 불가사이한 경전으로 60『화엄경』과 80『화엄경』모두 대승불교가 성하고 대수경전을 많이 보관하고 있던
우전에 있었다.

798년 반야삼장이 번역한 40『화엄경』은완본이 아니라『입법계품』만이다.
이 40『화엄경』은 795년에 남인도 오차국의 사자왕이 손수 베껴 쓴 『화엄경』의 범본을 당나라 법종에게 보낸 것이다.
방대한 60『화엄경』과 80『화엄경』모두가 우전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은 이 『화엄경』들이 우전에서 편찬되어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더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우전의 전설에는
『화엄경』의 교주와 같은 이름인 비로자나나한 이라고 하는 나한이 있었다.
막의 오아시스였던 우전이 지금은 화전현으로 바뀌고 옛날의 성터나 절터도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이곳 대승불교를 신봉하던 불교 국가가 존재했으며, 또한 많은 대승경전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승경전중의 하나가 바로 『화엄경』이다.
더구나 이경의 범본은 300년의 긴 세월 동안 우전국에서 잠자고 있다가
하나는 420년에,다른 하나는 699년에 중국말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제2화

부처님을 찬송하는 노래-세간정안품

하늘나라 병사와 아수라의 싸움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우전에 반야미가박(이하‘반야’라고 약칭)이라는 한 사미승(막 출가한 견습 승려)이 있었다.
반야는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언제나 『화엄경』을 독송하였다.
우전에서는 『화엄경』을 항상 경장에 넣어 보관하였으므로반야는 어느 절에서 『화엄경』을 구하여 읽었음에 틀림없다.
『화엄경』은 워낙 방대하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야는 몇 년간 일심으로 읽고 있었으므로 때때로 신비스런 영험을 느낄수가 있었다.

어느날 이었다.이상하게 생긴 낯선 두 사람이 반야 앞에 나타나 예배.합장하며 앉았다.
반야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수 없는 이상한 두 사람을 괴이하게 여겨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하늘을 가리키면서 자기들은 하늘에 살고 있는데 당신을 모시러 왔으니 조용히 하늘 나라로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실은 천제께서 우리들에게 법사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반야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이라 놀라고 무서워 망연자실하였다.
“두려워 할 것 없다 눈을 감아 보아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반야는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이상한 두 사람과 함께 천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화려한 궁전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천제가 앉아 있었다.
천제는 반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금 하늘나라 병사들과 아수라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 병사들이 격퇴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제발『화엄경』을 독송하셔서 그 법력으로 하늘의 병력을 이끌어 저 아수라를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하였다. 반야는 그 청을 기꺼이 받아 드렸다.
이에 반야는 하늘의 전차를 타고,깃발을 흔들면서,마음 속으로는 『화엄경』의 미묘한 가르침을 외웠다.
하늘나라 병사들도 모두 용감히 적과 맞서 싸웠다.이것을 본 아수라 들을 놀라서 흩어져 도망 갔다.
하늘 나라 사람들은 기뻐서 “이것은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반야는“나는 다른 어떤것도 필요 없습니다.다만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늘나라 사람들은 고마워 하며 “당신의 소원은 우리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합니다그 외에 우리들이 해드릴 것은 없습니까?”라고 거듭 묻자 반야는 위없는 깨달음 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후 반야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입고 있던 의복에는 향기로운 하늘의 향내가 배어서 그가 죽은 후 에도 의복의 향내는 없어지ㅣ지 않았다.
반야가 지상으로 내려온지 수 년이 지나자,아무런 병없이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향하게 누운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나는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영창 원년(689)2월4일,우전국의 삼장법사였던 인다파야가 중국 장안의 위국동사를 찾아왔다.
당시 위국동사에는 마침 화엄종의 대성자인 현수대사 법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삼장법사는 법장에게 천상에 올라간 반야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지금부터35년전에 실제로 우전국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말했다.(화엄경전기)
하늘나라 병사들과 아수라가 싸웠을때『화엄경』을 독송하여 아수라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는 『화엄경』에 악마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전국의 사건이므로『화엄경』과 우전국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한국의 화엄관계 문헌 즉,고려 균여의(법계도원통기) 및 (법계도기 총수록)에서는 5중의 해인 삼매를 설하는데,그것은 모두 제석천과 아수라의 싸움이다.
우전에서 일어난 하늘나라의 병사와 아수라의 싸움은 화엄종의 제 2조 지엄이 설한것으로서,이것은 한국에 전래된 것이다.
물론 천제와 아수라의 싸움은 (정법념처경)권 18에도 나오지만 5중의 삼매에 대한 설명은 없으므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갖가지 꽃으로 장식

60『화엄경』은 34품(品이란 章을 의미한다)으로 구성되어 있다.제 1품은 (세간정안품)으로서,세간을 비추는 청정한 눈인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음 마갈타국의 니련선하 강가 깨달음의 장소에서의 모임이었다.
먼저 『화엄경』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신 적멸도량의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그 땅은 금강으로 되어 있으며 엄숙하고 깨끗함을 갖추었다. 온갖 보배와 꽃으로 장식하였으며, 최상의 묘한 보배 바퀴(寶輪)는 원만하고 청정하며 ,한량없는 묘한 빛깔로써 여러 가지로 장엄하여 마치 큰 바다와 같았다.

참으로 찬란한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갖가지 꽃으로 장식하였으며”라고 하는 것은 화엄의 의미 인 것이다.
‘화엄’을 범어로 말하면 간다_뷰화 이며,이것을 중국 말로 번역하면 ‘잡화엄식’‘즉 갖가지 꽃으로 장식하다가 되는 것이다.
일조삼장에 의하면‘뷰화’라고 하는 것은 서역지방에서 사용하는 부처님을 공경하는 도구를 말한다.
그 모양은 6단으로 되어있는데,아래쪽이 넓고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며 꽃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각 단에는 불상으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갖가지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 화엄의 의미다.
목련처럼 품위있는 꽃도 국화와 같이 가련한 꽃도 모두 이 속에 포함된다.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 장식된 곳이 깨달음의을 연 부처님이 계시는 도량인 것이다.
이 도량은 꽃이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한량없는 보석이 비처럼 내려 흩날리고 광명이 온천지에 가득하였다.
부처님이 앉아있는 자리의 뒤쪽에 있는 보리수는 빛을 발하여 시방세계를 비추며,그 둥치는 맑고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고,줄기와 꽃과 잎도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사자좌는 큰 바다처럼 넓고 ,보석과 꽃으로 장식되어 빛을 발하였다.
우전국의 반야가 천상에서 본 궁전도 경전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장엄된 세계였을 것이다.
그것은 보화,보륜,묘색,당특,향만,보망,우보,화수,불력,기특의 10가지 장엄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천상의 장엄도 지상계의 장엄과도 같았다.
그 국토의 지하는 바람의 바퀴와 향기로운 바다와 연꽃으로 장식되었고,지상은 묘한 보배와 광명과 향기로운 강과 온갖 나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옛날 오아시스의 도시 우전에는 강에서 보석으로 채집되고,푸른 수목은 여행자의 눈을 쉬게 해주었다.
또한 채집되는 향기로운 강에도 찬란한 태양광선이 내리비치고 있었으므로 이 우전의 국토도 경전의 내용과 같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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