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20
남도의 해남, 강진 선조의 넋과 美를 찾아서..
 글쓴이 : 윤영상
조회 : 2,105  

남도의 해남, 강진 선조의 넋과 美를 찾아서.....


윤영상 (주)다산 회장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김지하 애린에서

그 동안 많은 여행을 해 보았지만 이번처럼 새색시 시집가듯 설레는 마음을 가져본 것이 얼마만인가. 처음 가본 여행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들뜬 마음으로 장만기 회장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어느덧 오랜 친구가 되어 남도를 향하고 있었다.
유월의 신록이 가득하기 시작한 우리의 산하는 한참 싱싱한 산천정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스치고 지나기만 해도 촉촉한 기가 승해질 그런 산하의 기운이 일행을 감싸고 있었으며, 저절로 콧노래가 맴돌고 있었다. 마치 두고 온 속세의 온갖 시름이 다 묻혀버린 듯 했다. 아마도 그것은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오는 미지에 대한 흥분과 아름다움의 자극에서 일깨워지는 만족감 때문일까.

서울을 떠난 지 4시간도 채 안되어 이미 일행은 호남의 개골산이라 했던가? 높이는 비록 해발 228m에 불과하지만 그 기상은 백두산 못지 않은 유달산의 정기를 듬뿍 담고 있는 목포에 도착하여 남도의 인정이 묻어있는 미각의 행복에 잠시 도취할 수 있었다. 또한 김성호 전 복지부장관의 따뜻한 영접으로 인해 일행들은 잠시 여행의 목적을 망각한 채 목포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삼매경에서 빠져 나온 우리는 목포가 고향인 최낙경 화백의 구수한 입담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깃 들어 있는 노적봉과 슬픈 삼학도의 전설을 들으며 해남으로 향했다.
해남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여름날 강변 미루나무 잎새처럼 싱싱해지고 잘 삭은 토하젓에 버무린 비빔밥처럼 따뜻해진다. 내가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길이 지닌 맑은 영혼 때문일 것이다. 그윽하고 수려한 필치로 그려진 남종 문인화와 같은 남도의 꿈과 사랑과 한을 품고 있는 土末이 아닌 土始라 할 수 있는 그곳으로의 만남은 기쁨 그 자체였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두었네. 세상의 어떤 일이 내 마음에 이르러는 넘치는 내 호기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한 곡조 미친 노래를 외 홀로 읊조린다네
孤山 尹善道

두륜산으로 가는 신작로를 지나 덕음산 기슭 연동에 있는 綠雨堂에 도착한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것은 오백년도 족히 넘었을 은행나무였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잎이 ‘녹색의 비’ 같아서 이름 지어진 이 집의 당호는 단순한 ‘은행잎의 비’가 아니었다.
孤山 尹善道, 恭齋 尹斗緖, 茶山 丁若鏞의 숨결이 이 집 곳곳에 스며 있었다. 고산 선생의 14대손인 윤형식의 배려로 玉洞 李漵가 쓴 녹우당 편액이 붙은 안채에 일행들은 장성군수 김흥식과 함께 올라앉아 녹우당의 역사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녹우당은 고산의 4대 조부인 孝貞이 기둥을 세운 이후 사랑채는 효종이 스승인 고산에게 하사하였던 경기도 수원 집을 현종 9년 해상 운송으로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또한 집 앞 유물 전시관의 金鎖洞集古, 山中新曲 등 윤선도가 직접 쓴 가첩, 지정14년 노비문권 및 공재 선생의 자화상, 버드나무 밑에 선 백마, 별자리 그림,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 등 수많은 유물이 현존하는 배경에는 윤씨 종가 며느리들의 대를 이어오는 정성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다라는 사실은 일행들을 놀라게 하였다.
녹우당 뒤편의 윤씨 종가가 심었다는 비자나무 숲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미황사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속엔 이미 고산 윤선도의 정신과 공재 윤두서의 예술혼이 그윽히 자리 잡고 있었다.

땅끝 마을로 향하던 일행들은 기이한 산줄기 하나가 뻗어있어 바위 능선이 하늘과 땅 사이를 들쭉날쭉한 선을 그으면서 한참이나 이어지며 나무가 거의 없는 뾰족한 바위들이 띠를 이루어 하늘에 떠있는 듯한 산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산은 해발 489m, 능선길이만 12km인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달마산이었다. 그 달마산의 중턱엔 우리 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美黃寺가 먼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창궐했던 예전에 비해서 기세등등하지는 않지만 결코 적막하거나 스산한 절은 아니다. 바위산 능선이 그려내는 거친 선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동백나무 숲으로 소복하게 감싸인 절터와 경쾌하되 가볍지 않은 대웅전의 참한 품새를 마주하고 보면 오히려 이름난 사찰보다 못할 것이 없는 그런 절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산사에서 직접 차를 끓여주는 금강스님을 만나 미황사의 창건 설화 및 창궐했던 미황사의 역사를 듣던 민화식 해남군수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또 다른 감탄사를 내뿜으며 그렇게 빠져들고 있었다. 미황사의 깔끔한 공양을 마치고 금강스님이 끓여주는 마차를 마시며 우리는 산사의 밤이 저물어 가는지도 모르게 금강스님의 차 향기만큼이나 맑은 온화함과 미황사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었다.

단청이 다 벗겨진 대웅전에서 고색창연한 고찰로서의 늙은 어머니의 품 속 같은 푸근함을 느끼며 울창한 숲 속을 지나 土末로 향했다. 土末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의 그림자는 깊이 드리워져 있어 땅끝 마을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으나, 土末卑에 새겨진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한겨레가 국토를 그어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이니라’를 음미하면서 도착한 순간에는 땅 끝이었지만 돌아서는 우리의 가슴속에 그곳이 땅끝이 아닌 땅의 시작임을 느꼈다. 숙소가 있는 강진군 신전면 수양 관광농원에 밤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하루의 긴 여정을 풀었다.

강진은 전남 서남부에 자리하여 동으로는 장흥, 서로는 해남, 북으로는 영암, 그리고 남으로는 바다를 끼고 완도와 이웃한 조용하고 아늑한 고장이다.
강진은 강진만을 중심으로 서쪽이 귀족적인 절경을 자랑한다면 동쪽은 서민적이요, 서쪽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일몰과 월몰이 장관이라면 동쪽은 천관산 자락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일출과 월출이 또한 장관이다. 강진사람들은 生居七良 死去寶岩이라는 구절을 입에 오르내리는데 이는 “칠량에서 살다가 죽으면 보암에 묻힌다”라는 뜻으로 생전에는 오곡과 어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탐진만의 동쪽에 있는 칠량이 좋고, 죽어서는 산세가 좋고 명당이 많은 탐진만의 서쪽 보암에 묻히겠다는 뜻인데 이를 보더라도 강진은 아름답고 곡식이 풍부한 고장임을 알 수 있다.

훨훨 나는 새들이 내 뜰 매화가지에 쉬네. 향기 사뭇 진해서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러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茶山 丁若鏞

강진읍에서 남서쪽을 향해 구강포 서쪽 모퉁이를 끼고 비스듬이 내려오면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닿게 된다. 마을 뒤의 만덕산 기슭에는 茶山 丁若鏞의 유배지이고 茶山學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茶山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곳에서 일행들은 윤동환 강진군수의 설명으로 다산의 일대기와 다산 초당에 얽힌 사연 및 다산의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다산은 18년에 걸친 강진 유배 살이 중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자기 생애의 한겨울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렸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 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고 한다. 나의 7대조 할아버님인 윤단의 아들인 尹奎魯는 정약용을 다산초당에 초빙하여 오늘날의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꽃피운 산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일행들은 절로 감탄하기도 했다.
우리는 평소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였던 추사 김정희의 茶山艸堂과 寶丁山房이 적힌 현판을 발견하면서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에 이르는 조선시대 최고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茶山四景이라 하여 초당 앞마당에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茶竈 (차 부뚜막),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藥泉이 있으며, 초당으로 이주 후 바닷가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는 蓮池石仮山이 있으며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丁石바위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다산은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백련사에 거처했던 혜장선사와 함께 우리 차 맛에 깊이 빠졌다고 한다. 그의 저서인 東茶記에 보면 차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일행들은 천일각을 지나 백련사를 향했다. 절 입구부터 해 묵은 동백 숲으로 뒤덮여서 3~400m에 이르는 길이 대낮에도 어둑어둑한 숲의 동굴을 이루고 있었다. 동백나무 숲 속에 파 뭍인 아담한 절에는 혜장선사와 다산 선생의 儒, 佛의 경계를 넘어 교분을 두터이 했다는 선생의 맑은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는 신비함이 느껴진다. 위대했지만 굴곡이 많았던 다산의 일생을 한 토막씩 되새김질을 하면서 다산이 먹었던 그 차를 어머님께서 손수 끓여서 일행들에게 대접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산과 하나가 되었다는 역사의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한국 인물화의 대가인 노 광 화백은 내 어머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연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해남에서 보았던 녹우당의 멋들어진 모습과 그곳에서 우리 일행들이 감탄했던 해남 윤씨 며느리들이 선열의 유품을 지키고자 했던 모습을 노 광 화백은 다산 초당에 계신 내 어머니에게서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가 담아 주신 차와 매실주를 가득 차에 싣고 일행들은 손수익 전 교통부장관과 이준범 동신대 총장이 마련한 영랑 생가 근처에 있는 맛깔스러운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남도 절정의 맛을 느낄 수 있었으며 손수익 전 장관의 해박한 강진 이야기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손수익 전 장관은 일행을 ‘북도에 소월, 남도의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를 안내하였다. 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싼 그의 생가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있었고 마침 모란꽃이 만발함에 젖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려야 했던 그의 사상에 매료되고 있었다.
일행은 마지막 여행지인 고려청자 도요지를 손수익 전 장관, 이준범 총장과 함께 방문하여 선열들의 얼이 담겨있는 비색 청자의 은은한 신비감에 사로잡혀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1박2일의 짧은 일정을 끝마치고 출발지였던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설레임과 낯설음이 있었지만 남도 여행을 통해 우리는 어느덧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해남의 녹우당, 미황사, 토말을 거쳐 다산초당, 영랑 생가, 고려청자 도요지에 이르는 여행을 통해 함께 아름다움에 젖어들고, 역사 속에 빠져드는 시간 속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기에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었고, 그런 좋은 추억이 바탕이 되어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다 위로 떨어지는 석양을 천천히 바라보며 지금껏 걸어온 길과 그리고 그 길의 영혼을 생각했던 좋은 시간이었다. 힘들고 쓸쓸하고 두렵고 어리석었던 세상의 모든 시간과 작별을 고하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벗삼아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싱싱하게 솟구쳐 오르는 태양의 햇살을 내 온 몸 구석구석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우리는 남도의 깊은 사랑과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의 넋과 예술 혼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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