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2-21 16:19
관광해남-미황사 이야기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141  

관 광 해 남

미 황 사

으로

anib11.gif위치와 창건

그동안 대둔사에 가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미황사(美黃寺)는 최근 수려한 달마산의 모습과 고찰의 독특한 분위기가 부각되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

그만큼 미황사는 오랜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난 문화유산과 숨겨진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곳으로 그 숨겨진 모습들이 하나씩 들어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대둔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에 해지는 낙조의 모습과 함께 3황(3가지 아름다운정경)이 있을 정도로 산경의 모습이 뛰어나기도 하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이에관한 기록으로는 1692년(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옛 통도사터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있다.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 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둔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이 된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다라 물에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 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조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요사체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문수암,보현암,남암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 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곳 서정리 사람들도 비바람 몰아치는 을씨년 날씨를 "미황사 스님들 궁고치 한다"하는 표현을 속담처럼 쓰고 있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있고, 진법군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어 전설같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준다.

anib11.gif미황사 창건설화

미황사의 창건시기를 적은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재미있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미황사 사적비

이에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지금의 송지면 갈두리)에 와 닿았다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히 배가 멀어져갔다.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 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컷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화엄경(華嚴經)80묶음, 법화경(法華經)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등이 있고 금환과 혹석이 각 한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때 혹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모실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곳에 경을 봉안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이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했다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는 보편적인 불교의 북방 전래설과는 달리 바다를 통한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anib11.gif대웅전과 괘불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은 단청이 거의 벗겨져 있어 화려함 대신 자연에 가까운 단아한 느낌이 훨씬 더 절을 고풍스럽게 한다. 미황사 괘불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를 하고 이위에 연화문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둥이다. 무거운 지붕을 받쳐주는 베흘림 기둥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으로 팔작지붕과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주춧돌로 그 위에 물고기,게,문어등이 양각돼어 있으며 조각된 동물문형은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불교와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형은 이곳의 부도에도 나타나 미황사의 독특한 사찰양식을 알 수있다.

대웅전 안에는 미황사의 보물이라고 할 수있는 괘불이 있다. 영험있는 하느님의 마누라로 통하는 미황사 괘불은 지금의 대웅전이 중건되기 전인 1727년경에 제작된 조선후기 괘불로 높이가 10여m가량 되는 큰 괘불이다.

괘불은 탱화와 같은 거대한 걸개그림으로 평소에는 법당안에 모셔져 있다가 야외법회가 있을때 내결게 된다. 예전에는 이러한 야외법회가 자주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에 와서는 보기 힘들어졌다.

이 괘불은 가뭄에 내걸고 제사를 지내면 비를 내린다는 속설이 있어왔다.

실제로 지난 1992년 큰 가뭄이 들때 미황사 괘불봉안식이 행해졌다. 이때 어김없이 구름낀 사이로 비가내려 그 신통력을 발휘했다.

또 달마산 정상의 불봉 봉화대에 연기를 피우면 명산 달마산에 불이 났다고 비를 내렸다 한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봉수지로 완도의 숙승봉에서 연락을 받아 화산면 관두산으로 연결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이러한 기우제는 민간신앙에 널리 퍼져 있는 유형이기는 하지만 미황사는 불교와 민중신앙이 더욱 습합되어 나타난다. 이곳의 부도전에 나타나는 게,물고기,거북,학,연꽃등의 독특한 조각에서도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큰 가뭄이 지속되던 이무렵 이곳 서정리,치소리,장춘리등 달마산 일대 마을에서는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비가 계속 오지않자 도솔봉 명당터에 묘를 쓴 사람이 있어 비가오지 않는 다고 믿은 마을 부녀회원 수백명이 산에 올라가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옛날부터 절터 주변의 명당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는 말이 있어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었다. 이 일로 묘 주인이 고발하여 법정소송까지 일어났으나 다행이 비가내려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이곳 사람들의 민간신앙이 아직도 사찰 주변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anib11.gif부도전

미황사에서 가장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것중에 하나가 부도전이다. 미황사는 석양의 낙조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대웅전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약 500m쯤 내려가면 옛 통교사터 바로옆에 21기가 있는 남부도전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200여m쯤 내려가면 6기가 있는 서부도전이 나온다.

이 부도들은 대략 18∼19C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다에 가까운 영향 때문인지 부도에는 물고기, 게, 문어, 거북이등의 특이한 문양들이 부도의 기단부,또는 전면에 조각되어 있다.

부도에 나타나는 조각이 모두 토속적이며 신라말 고려초 부도의 화려함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파격성을 띄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힘든 물고기,게 거북이등 다양한 형태가 조각되어 있다.

미황사의 부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선자님은 이러한 부도의 조각 형태를 이지방 불교계의 특징과 관련이 깊다고 보고있다.

미황사부도는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가 유학을 수용하는 18C와 19C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유행하던 실학사상을 진보적인 유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는 승려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것이 불교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것다.

여기서 자유로운 의식의 구현이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며 이곳 부도의 형식이 독특함과 다양화를 추구하는 뒷받침이 된다. 이때 이미 토속적이며 민간신앙적으로 발전해가는 이 지방의 불교는 거북이, 물고기, 방아를 찧는 토끼등을 부도에 조각하고 한편으로는 이것들을 지역적 토착성을 지닌 불교적 상징으로 인식하게 되어 쉽게 받어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는 미황사 부도전의 조각을 통해 불교사상과 민간신앙이 그 시대의 요청에 의해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장식되었고 그래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민중적 사실주의로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보고있다.

anib11.gif달마산의 자연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기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십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멀리서 보면 그 기묘함을 실감하기 어려우나 미황사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마침 해가 지는 노을역이라도 되면 서편으로 지는 낙조의 름다움은 부처의 누른빛, 바위에 이끼낀 누른빛깔과 함께 3황(黃)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래서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그중에 하나가 누른 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샘이다. 이곳은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금샘이 있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듯해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이 금샘에 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이곳에는 '전라도 낭주(郎州)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깎은듯한 것이 두세사람은 앉을만 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함께 도솔암 아래에는 용담이 있다. 이곳 도솔암은 미황사의 열두암자중에 하나로 달마산의 가장 정상부에 있어 구름이라도 끼인 날이며 마치 구름속에 떠있는 듯한 느낌에서 새로운 선경의 세게에 와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석축을 쌓아올려 평평하게 만든 곳에 자리잡은 도솔암터는 마치 견고한 요새와도 같으며 도를 닦아 바로 하늘로 승천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 도솔암에서 50m쯤 아래에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인 용담이 있다. 바위산의 산 정상부에 샘이 있다는것 자체부터 신비함을 느끼게 하는데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는 곳이다.

약 3m정도의 높이에 어른 3∼4명은 충분히 들어갈수 있는 굴속에 샘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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