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2-21 16:20
미황사 이야기-한국의 산천에서 퍼옴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145  
미황사 달마산



♣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불교가 한창 흥할 때는 불교의 요람이 되어 스님도 많았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대웅보전(보물 947호), 응진당(보물 1183호)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서해바다로 지는 화려한 낙조와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는 방문객들에게 늘 즐거운 풍경을 제공해준다.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보전의 앉음새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특히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거북, 게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으며, 가뭄이 들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보물1342호)과 대웅보전이나 웅진전 안 벽과 천장에 그려진 18세기의 벽화들,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을 살피는 재미가 사뭇 크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긴 돌확이 있어 항시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숲속으로 난 길을 들어서서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도밭에 닿는다. 부도마다 거북, 게, 새,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져있어 한적한 산속에서 뜻밖에 꾸밈없는 표정들을 만날 수 있다.

절에서 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거리로 기암괴석이 들쭉날쭉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 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낙조는 매우 아름다우며, 절 바로 아래에는 동백나무 동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신문기사 (오마이뉴스)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절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황사를 최고 아름다운 절로 꼽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 전남 해남의 절이기도 하다. 땅끝 마을이 이 절에서 별로 멀지 않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오밀조밀 바위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달마산 쪽으로 올라가면 미황사가 나온다. 오동나무 숲을 지나 올라가면 커다란 누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좌우의 오동나무 숲이 일주문, 천왕문의 역할을 한 셈이다. 경사가 심한 곳에 절간을 세웠으니, 누대 아래 통로를 만들어 그 속으로 올라가는 누하진입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누대를 다 올라가면 신천지가 펼쳐진다. 저 멀리 달마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중앙에 대웅전이 기품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달마산은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고 깔끔하다. 이 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이 두 팔을 벌려 오는 이들을 맘을 열어 제치고 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좌우의 요사채와 뒤쪽의 응진당 등 최소한의 건물들과 뒤쪽의 산세는 애초부터 한 짝일 수밖에 없었다.

대웅전의 굵직굵직한 기둥은 원래부터 그랬는지 허옇게 속살을 다 내놓고 있다. 막돌로 쌓은 높직한 기단이 대웅전의 크기와 적당하다. 공포의 단청도 세월에 바랬다. 대웅전은 까만 머리와 속살을 살짝 드러낸 여성이 아름다운 몸매를 부끄러운 듯 뽐내며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에 압도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간 찾는 재미 하나는 놓치는 사람이다.
좌우에 놓인 계단을 올라 옆문으로 대웅전 안에 들어간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집이다. 부처님이 계신 세상이니 진리의 세상이고, 극락의 세상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분의 부처님이 앉아 있다. 부처님들은 깨끗한 탱화를 배경으로 앉아 있고, 그 자리를 위쪽의 닫집과 좌우 기둥의 용 그림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무언가 신성한 일이 금방 일어날 것 같다. 신성하고 경건한 진리의 세상이 이런 분위기인가 보다.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유명한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전달하는 공포가 많다. 기둥 밖으로 뻗은 지붕을 힘 있게 지탱하기 위해서 기둥 위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두 개를 더 설치하였다. 지붕은 측면도 경사지게 만든 팔작이다. 이른바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를 기둥 바깥으로 3개, 안으로는 4개나 더 내걸었다. 외3출목 내4출목의 복잡하고 화려한 형식을 갖추었다.

공포 각 부재는 안팎의 장식에 최대한 활용하였다. 공포 살미의 끝은 위로 한껏 치올라갔고, 3단으로 짜인 각 부재 아래 부분은 꽃잎처럼 장식하였다. 마치 집 전체가 활짝 핀 꽃모양이 되었다. 중앙의 두 기둥 위에는 들보를 끌어내고, 그 끝에 용을 조각해 넣었다. 정면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로 물씬 상승되고 있다.

바깥에서 대웅전을 쳐다보면서 형성된 신성한 감정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더욱 심화된다. 내4출목의 공포는 화려의 극을 달리고 있다. 천정 아랫부분이 활짝 핀 거대한 연꽃처럼 보인다. 그 연꽃 가운데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 아래에는 최고급 단청을 한 대들보가 가로지르고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 반듯반듯한 천정을 해 넣었다. 여기에 도안한 범어자와 온갖 풀과 동물 문양의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화려의 극을 달리고 있다. 고려와 조선 전기 건축물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함이다. 17세기 사람들은 부처님 진리의 세상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웅전에서 나와 돌담이 트인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응진당이 나온다.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이 응진전 혹은 나한전이다. 부처보다 한단 아래 존재이니 집 이름도 그에 걸맞게 응진당이라 붙이기도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받은 존재이니 중앙에 부처가 있고 좌우에 나한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대웅전과는 달리 응진당은 최근에 빽빽이 단청을 하였는지 일단 형형색색으로 더욱 화려하다. 대웅전이 기품 있게 화려하다면, 그의 제자격인 응진당은 크기와 위치에서 격하되었고, 화려한 색을 동원하여 금방 눈에 띄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품격에 있어서 자신 자리 찾기의 본모습이라 하겠다.

응진당은 중앙에 계단을 가진 막돌로 쌓은 조그만 기단을 가졌다. 작은 건물이지만 외3출목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화려해질 수 있는 조건을 다 지니고 있다. 중앙 두 기둥 위에는 대들보를 빼내어 용을 조각해 넣었고, 귀퉁이 쪽 두 기둥 위에는 앙증맞은 도깨비 그림을 그려 넣어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정면에만 문이 있으니 중앙으로 들어간다. 내4출목의 공포가 빽빽이 천정 아랫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천정은 네모반듯한 천정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 같다고 해서 우물천정이라고 한다. 네모 안에는 연꽃을 동그랗게 그려 넣었다.

공포의 각 부재들을 대웅전의 화려한 꽃모양과는 달리 부드럽고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응진당의 내출목을 대웅전처럼 처리했더라면 극을 달한 치장끼리 충돌하여 매우 천박해졌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건물은 치장의 절제를 통하여 품격을 더 높일 수 있음을 우리는 이 응진당에서 느낄 수 있다.

미황사는 17세기에 만든 기초 위에 18세기 건축 방식이 개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17세기 중엽에 중건하고, 18세기 중엽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응진당에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여럿 나열해있다. 매우 개성적인 모습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존재로 전지전능하지만, 매우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기 쉽다. 나의 소원은 너무 사소하여 잘 들어줄 것 같지 않다. 이런 때는 바로 응진당을 찾아 맘에 드는 분을 골라 떼를 쓰면 될 일이다. 논산 쌍계사에도 이런 분들이 수두룩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냄새가 심해진다.

이제 날은 어둑어둑해져 미황사를 떠나야 한다. 응진당의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분들도 헤어져야 한다. 뒤돌아보면 멋있는 달마산이 왈칵 발걸음을 낚아챈다. 누대 아래로 내려가면 대웅전이 속살까지 드러낸 아름다운 자태로 자고 가라고 유혹한다. 이대로 가면 언제 다시 저 품에 안길 수 있을까? 그냥 콱 여기서 살아버릴까? 자식들 얼굴이 금방 떠오른다. 할 수없이 발길을 옮긴다. 대웅전이 말한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

○ 달마산 도솔봉 보기 클릭 ■☞ 달마산
○ 해남읍버스터미널 앞에서 완도방면 13번국도를 따라 약 20km쯤 가면 현산면농협 앞이다. 농협 앞에서 완도방면으로 8.3km 더 가면 길 오른쪽에 S-oil 월송주유소 앞. 여기서 0.5km 더 가서 오른쪽 월송리 가는 1번 군도로로 우회전. 이 길을 따라 송지방면으로 6km쯤 가면 서정리 서정초등학교(오른쪽) 를 지나게 되고 학교 지나면 곧바로 길 왼쪽으로 미황사 가는 길이다. 길을 따라1.6km쯤 산 속으로 가면 미황사 입구 주차장이다.
○ 강진, 완도방면에서는 남창, 월송을 경유하면 된다.
월송 - 서정리 5Km, 서정리 - 미황사 2Km
서정리 - 송호해수욕장 13 Km, 서정리 - 땅끝마을 15 Km
○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 전남 해남은 육지의 끝을 품은 또 다른 극점이다.
혹시 한계에 서 본 적이 있는가 . 일상에 지치고 체념에 스러져 맥없이 떠밀려 온 벼랑. 끝은 낯설음이요 두려움이다. 하지만 막상 더는 갈 수 없는 그 곳에 서면 드디어 멈춰 있던 내 안의 엔진이 작동한다. 내면의 울림이 들리기 시작하고 맑은 사색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속절없이 낙하하던 공이 바닥에 이르러 튕겨 오르듯, 끝은 반동(反動)의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곳이다. 더는 갈 수 없음이 다시 시작할 눈을 뜨게 해 줘 이 뭍의 끝자락은 다시 뭍으로 향한 출발점이 된다.
절망을 털고 희망을 안고 가는 해남의 땅 또한 모든걸 감싸 안을 만큼 따뜻하고 아늑하다. 한반도의 끝에 삐죽 솟은 해남은 그 자체로 3면이 바다인 반도다. 호수 같은 바다와 보석 같은 섬들로 둘러싸이고 핏빛 황토의 들판이 출렁이는 넉넉한 땅이다.
산세의 수려함도 녹록지 않다. 백두대간의 성난 호흡은 지리산에서 정점을 찍은 뒤 땅끝으로 흘러 들어 숨을 고른다. 영암의 월출산을 관통한 그 흐름은 '해남의 영산(靈山)' 두륜산에서 자태를 뽐내고 다시 '해남의 금강(金剛)'이라 하는 달마산에 내려와 마지막 혼을 불사른다.
질박한 아름다움이 숨쉬는 해남, 생명의 싱그러움이 꿈틀대는 땅끝. 그대 혹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가. 그럼 지금 해남으로 가시라. 그 임계점으로.

해남의 땅끝 마을이 육지의 최남단이라면 달마산의 미황사는 육지 끝의 절이다. 목포에서 고속 도로를 빠져나와 미황사로 향하는 길은 걸쭉한 남도의 풍경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시뻘건 황토 벌판이 넘실대고, 간척 사업에 막혀 호수가 된 바다는 소르르 해무를 피워 낸다.
두륜산의 자락은 땅끝으로 이어지다 달마산에서 수직 바위를 일렬로 뿜어냈다. 최고 높이 489m로 높지 않으나 해수면에서부터 솟아 오른 덕에 산세가 녹록치 않다. 칼처럼, 창처럼 솟구친 바위의 능선은 달마산 정상인 불선봉을 지나 도솔봉(421m)까지 약 8㎞에 거쳐 이어진 다음 땅끝에 솟은 사자봉에서 갈무리된다.
이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편 자락 볕 좋은 곳에 미황사가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절로 오르는 길에는 동백나무가 열지어 섰다. 지금은 다 지고도 남을 때인데 어쩌다 한 두 송이 여전히 붉게 꽃을 피우고 있다. 강인한 생명력이다.
미황사 대웅전 뜨락에 서니 거기가 바로 극락이다. 미끈하게 잘 생긴 대웅전은 긴 세월 동안 단청의 빛이 바래 맨 얼굴이다. 화장하지 않은 기둥과 지붕은 투명한 나뭇빛 그대로다. 독경 소리 울려 퍼지는 대웅전 너머로는 달마산 암봉이 마치 호위 군사마냥 늘어서서 사찰을 지키고 있다. 마냥 넋을 빼는 풍경이지만 경내는 내려오는 길에 다시 둘러 보기로 하고 먼저 산으로 올랐다.
적당한 경사의 산길은 험하지도 또 너무 지루하지도 않아 산행에 제격이다. 낙엽이 썩고 또 썩어 만든 흙이라 새까만 길이 푹신하다. 초록의 터널을 지나는 길 내 숨소리마저 싱그럽다.
한 30분 올랐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힐 무렵 달마산 바위 병풍이 바로 앞에서 막아섰다. 뒤돌아 보니 해남의 붉고 푸른 들판이 쫘악 펼쳐졌다. 눈부시도록 하얀 바위들은 햇볕을 마냥 빨아들이며 섰고 발아래 나무들은 푸른 옷으로 뒤덮였다.
조금만 더 바위를 타고 오르니 능선의 정점 문바위다. 건너편은 해남의 서편 바다가 지척이다. 굽이치는 땅무리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옅은 해무 사이로 아련히 보이는 다도해의 풍경은 잔잔한 진동으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공룡의 등짝처럼, 톱니처럼 늘어선 달마산 암봉의 능선도 옆에서 보니 그 흐름은 더욱 급하게 물결 쳤다.
미황사는 경을 싣고 가던 소가 누워 점지했다는 절집으로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된 천년 고찰. 한 때 도솔암 문수암 등 12암자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절은 불탔다가 다시 지어지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1900년대 초 주지 혼허 스님이 중건을 위해 모금차 스님들의 공연단인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 등 섬을 다녔는데 그 때 조난을 당해 젊은 스님들이 몰살됐다고 한다. 군고단 준비로 진 빚 때문에 절은 쇠퇴했고 잊혀져 왔다.
퇴락했던 절이 지금의 단아한 모습으로 살아난 것은 89년 이곳에 온 주지 금강 스님과 현공 스님 덕분이다. 두 분이 ‘지게 스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손수 돌을 나르고 굴삭기를 운전해 대웅전과 응진전 외에 흔적만 남아있던 누각들을 복원해 냈다.
미황사는 2002년부터 템플 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다. 예불 참선 다도 등 산사에서의 전통 문화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홈페이지(www.mihwangsa.com)와 전화 (061)533-3521로 미리 예약하면 된다.
[한국일보 2005-05-26]
○ 미황사 홈페이지 클릭 ■☞ http://www.mihwangsa.com
○ 대웅전(보물947호), 응진당(보물 1183호), 괘불(보물 13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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