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9-27 17:32
무거운 쌀자루
 글쓴이 : 에포케
조회 : 111  

어느 날 해질녁이었다.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날도 탁발 성적이 매우 좋아서 스님들의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그러나, 흐뭇한 마음과는 달리 짐은 몹시 무거웠고, 갈 길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바랑 끈은 어깨를 짓눌러 왔고, 만공 스님은 걸음이 빠른 경허 스님의 뒤를 죽을둥 살둥 쫓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허 화상이

"내 빨리 가는 방법을 한 번 써 볼 터이니, 자네 빨리 와보게나."

마침 어느 마을을 자나가게 되었다.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마침 삽짝문이 열리면서 젊은 아낙네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왔다. 스무 살 갓 넘겼을까 말까 한 아주 예쁜 새댁이었다.

앞서 가던 경허 스님이 먼저 여인과 마주쳤다. 엇갈려 지난다고 생각되는 순간 경허 스님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여인의 양 귀를 잡고 입술에 번개같이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집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소동은 곧 이웃에 퍼지고, 급기야 동네 사람들은

"저 놈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작대기나 몽둥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들고 뛰어 나왔다.

"아니, 어디서 요망한 중놈이 나타나 가지고촵촵촵촵촵촵촵촵촵촵촵촵촵!"

"어디, 맛 좀 보아라."

이렇게 소동이 번지자 스님은 두 말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쌀을 지고 뒤따라가던 만공 스님 또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함께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만공 스님은 온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앞서 뛰어 가는 경허 스님을 따랐다.

몽둥이를 들고 뒤쫓던 사람들의 추격은 무서운 속력을 내어 달아나는 두 스님을 끝까지 쫓지는 못했다.

이윽고 스님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 가게 되었다. 마을을 벗어나 절이 보이는 산길에 접어 든 스님은 마침내 만공 스님에게 말했다.

"쌀자루가 무겁더냐?"

"아이고 스님, 무거운지 어떤지,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재주가 어지간하지? 그러는 사이에 무거움도 잊고, 먼길을 단숨에 지나 왔으니 말이다."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을 바라보고 흔쾌히 웃으며, 석양(夕陽)이 비낀 먼 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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