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5-28 16:12
만족의 지혜 - Jorn Schakenraad
 글쓴이 : 다경
조회 : 912  
스스로를 '크리에이티브 큐리어스 트래블러(Creative Curious Traveler)'라 칭하는 욘 스카켄라드(Jorn Schakenraad)는 네덜란드 태생 디자이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도전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 정착해 느끼는 다양한 삶을 작품으로 옮기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 욘이 한국을 여행한다. 익숙지 않은 모습 그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를 즐기며,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푸른 새벽, 지난 모든 여정의 동지였던 자전거는 잠시 세워둔 채 홀로 길을 나섰다. 2014년의 마지막 여행은 다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떠나고 싶었기에 출발 직전까지 배낭 속을 들여다 보며 안에 담은 것을 몇 번이고 덜어냈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한반도 남쪽 끝으로 달려갔다. 얼마 즘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그 사이 해가 떠 오른 창 밖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전날부터 폭설주의보가 내렸다는 해남은 흡사 겨울왕국에라도 온 듯 온통 눈 투성이다. 조금 진부하긴 해도 '온 세상이 하얗다'라는 표현 외에는 더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인 네덜란드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채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한참을 걸어 하얀 숲 속으로 걷고 또 걸어 갔다. 그렇게 걷다 보니 흰 눈을 헤치고 피어난 빨간 꽃송이들이 눈길을 끈다. 동백꽃, 이 추운 겨울에도 계속해서 피고 지는 꽃송이가 아름답고 신기해서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산 속에 자리 잡은 '미황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찾아갔다. 오래 전부터 수도승들이 머무르며 수양했다는 사찰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특히 사찰 뒤편에서 겨울 안개에 숨었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달마산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비밀스럽게 자신을 슬쩍 내 보이다가도 금새 사라져 버리는 저 산 속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고요함이 감도는 눈 내린 사찰을 한 바퀴 돌아 본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선한 얼굴로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마음이 평온해 진다. 이 곳이 좋다. 착하고 따뜻한 기운이 차 오르는 이 곳에서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청마루에 앉아 잠시 한 숨을 돌리며 건너편에 보이는 기와지붕을 노트에 그리는 동안, 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아 내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기분을 더욱 상쾌하게 만든다.

똑, 똑, 똑
눈이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가 아름답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산 속 절에는 음악보다 아름다운 눈이 내린다.



점심 때가 되어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함께 소리 내어 기도문을 읽는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청정하게 살겠습니다."



기도문 뒤에 이어지는 식사는 평소에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한 끼의 감사함'이 피어난다. 마지막 밥 한 톨도 남기지 않도록 싹싹 긁어 먹으면서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이 곳에 온 것, 마침 눈이 내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게 된 것,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지금 그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식사 후에는 쌓인 눈을 치우고, 장작을 패고, 저녁에 먹을 감자를 깎고, 작은 소 일거리들을 돕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기에 서툰 솜씨라도 정성껏 일 손을 돕는다. 하지만 그 노동의 시간들이 오히려 예상치 못한 위로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는 일들 속에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고, 복잡했던 심경이 단순해져 간다. 몸을 움직일수록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일을 마치자 주지스님께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 주신다. 정성스럽게 내어주는 차 한 잔이 참 달다. 언젠가 인도여행에서 들렀던 사찰에서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는 모습을 보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 사람들이 한참 공들여 그린 모래 만다라를 금새 지워버리는 모습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기에, 스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완성이란 형체를 남기는 것이 아닌, 가슴에 새기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모든 일은 결과물을 남기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과정, 그리고 완성했을 때의 기억을 가슴에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기억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힘을 가지게 되고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된다고. 그러니 지금 일을 하는 것, 사람을 사귀는 것 그리고 여행을 하는 것은 결국 형제가 아닌 기억을 남기기 위한 성스러운 모래 만다라를 그리는 일과 닮아 있다는 이야기가 가슴 속에 쿵 하고 와 닿는다.


어떠한 형태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닌 그저 그것을 해 나가는 순간을 즐기고 만족하기 위해 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가끔 이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여행이 끝나고 어떤 결과물이 남지 않았더라고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남기지 못했더라고 괜찮다. 떠난 곳들에 대한 모든 기억은 나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을 테니까.


아무리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해도 자꾸만 생기는 욕심들은 어찌해야 할까. 스님께 조심스레 고민을 꺼내 본다. 그러자 스님은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씀을 이어간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열정과 의지가 중요하듯이,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고 말이다. 어떤 기준에 비교하려 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과거에는 이러이러해서 더 좋았는데, 미래에는 이렇게 된다면 더 행복해질 텐데, 그런 비교들로 지금을 비하하지 말고 매사를 절대적으로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나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나도 모르게 다른 기준을 세우며 지난 번 보다 더 좋고 나쁘다거나, 혹은 다른 누가했던 여행보다 더 낫다, 아니다를 비교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비교들이 나만의 절대적 체험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을 느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는 지혜를 배우게 되기를……마지막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속으로 되뇌어 본다.


이제껏 수 없이 많은 여행길에 올랐었다. 문득 여행을 하는 이유를 돌이켜 보니, 나는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좀 더 확실하게 느끼기 위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행복하자'라는 절대적인 여행의 이유 외에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에는 연연하지 말자 싶어진다. 한국, 그리고 한국 사람들, 설령 언젠가 내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떠난다 해도 그 기억들은 내 안에 있으니, 오늘 여행의 끝을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는 거대한 인연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좋은 기억만을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글: 욘 스카켄라드(Jorn Sckakenraad), 김희진
에디터: 김희진
사진: 김종현, 곽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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