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달마산 미황사

 

 

 

 
작성일 : 11-10-19 07:29
▒  김태정시인 사십구재
▒ 글쓴이 : 금강
조회 : 2,290  
   김태정 글.hwp (57.5K) [26] DATE : 2011-10-19 07:49:44

김태정시인 사십구재는
이번 일요일에 미황사에서 합니다.

2011년 10월 23일 오전 11시 미황사 대웅전


그동안 김태정시인을 생각하는 글을 모은것입니다.




 

김주대 조회 : 307

한 소식

나의 귀는
간신히 수화기를 넘어오는 아픈 너의
가녀린 목소리를 쓰다듬는다
움푹 파인 눈과 붉은 이마를 짚어본다
응답을 들은 적 없이 오랜 결핍에 누워 있다가
홀로 눈가로 가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식은 눈물 같은 너의 목소리와
야윈 손목을 가만히, 귀는 귀 기울여 잡아본다
라디오 한 대와 나란히 누워 풍화되고 있다는
농담 같은 남은 목숨을 짚어
목소리에 묻어오는 허리를 안아 본다
새처럼 가벼워지는 몸 암이 날개처럼 자란다
너는 스스로 깃털 같은 너를 허공에 뿌리고 있다
허옇게 말라붙은 죽은 지렁이 같은 입술
가문 땅처럼 갈라지는 등
검은 구름 속으로 점 하나의 새 날아간다
한 생을 온전히 지고 가는 새
전화기 너머
부고와 함께 떠나는 너의 하늘을 향해
나의 귀는 이승의 끝에서 까치발을 한다
점 하나의 새 지워지는 허공에 비가 내린다
한 생이 와서 죄 없이 살다가, 돌아간다고
귀가 젖는다

* 미안하다, 누나! 이제사 조시를 올리네. 잘 가. 거기나 여기나, 그런 생각의 날들이야. 봄이 되면 꽃으로 누나 온다니 그 웃음소리 들으러 갈라네.

김태정 시인에 대해|

박태정 | 2011.09.08. 14:28

김태정 시인 취재를 하던 중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난 주에 내보냈어야 했는데, 지면이 충분치 못해 결국 한 주 미뤘는데, 내보낼 수 없는 기사가 돼버렸습니다.

시인 김태정을 만나다

가난 고독 자연과 소통이 시를 이끄는 힘

해남종합병원 7병동 701호실 김태정 시인이 입원한 병실이다. 수년 전 대흥사 유스호스텔 일원에서 문학인 대회를 할 때 잠깐 조우를 했고, 바람결처럼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만 간간이 들었을 뿐 직접 만나 그녀의 시 세계를 들을 시간은 없었다.

꽃가게를 들러 그녀가 좋아 할지도 모를 나리꽃으로 꽃바구니를 주문해 들고 병실을 찾았다. 나름대로는 성의를 표하자는 것이었지만 불쑥, 그것도 아픈 뒤에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이 조심스럽고 미안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객의 인기척에 삐쩍 마른 몸을 힘들게 뒤척여 앉는다.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꽂혀 있다.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수척해진 왼뺨엔 물푸레나무의 물 같은 푸르스름한 검은 기미가 덮였다.

“숨이, 가빠서, 말을, 못하겠어요. 이해해, 주세요.” 말을 마친 시인이 다시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김태정 시인이 해남과 연을 맺게 된 건 10여년 전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소설가 정해주씨와 미황사를 들른 것이 인연이었다. 미황사에서 소설 집필을 마쳤던 정해주씨가 김태정 시인과 함께 미황사를 찾았다. 그로부터 2년 후 시인의 서울살이에 대해 전해들었던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의 간곡한 제안으로 김태정 시인은 마침내 미황사로 내려오게 된다. 그 당시를 시인은 그의 시 「미황사」에서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는 것은 열이레 달이 아닌 시인 자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시인에게 서울에서의 삶은 가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개당 50원짜리 실밥따기에 코피를 쏟아”야 했던 신산한 삶이었다. 시인에게 미황사는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이었다. 미황사는 시인에게 어머니의 자궁처럼 의지하고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한다.

그의 시 전편을 흐르는 정서는 가난과 고독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의 소통이다. 「궁핍이 나로 하여」에서 시인은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가난이 키운 것은 병이었다.

어쩌면 그의 삶이 자발적 가난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아왔던 그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여덟 남매를 낳았다는 윤씨 할머니, 간질병을 앓는 어란의 리미, 해창물산 경자언니 등으로 이어진다.

도심의 번잡함을 버리고 안착한 미황사는 그에게 자연과 소통하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미황사에서 쓰인 대부분의 시들은 자연과의 소통과 합일이다.

「배추 절이기」에서는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다고 해 배추에 이입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우영 시인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해설에서 “그가 사물과 만나는 방식은 사뭇 다정하고 나긋나긋하다. 잔잔하고 찬찬하게 다독거린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듯이 그렇게, 그는 세상과 대결한다기보다는 감싸안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다. 남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내성적인 그의 성품만큼 시 또한 드러나지 않은 곳에 관심을 갖는다. 물푸레나무의 은은한 빛은 어쩌면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시인은 해남병원에 입원해 있다. 음식은 전혀 먹을 수 없으며 유기농 과일과 우유로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 치료비는 오빠와 지인 미황사에서 부담하고 있다.

어쩌면 가난이 그의 병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살이를 끝마치고 내려올 때부터 가슴이 아파 뜸을 떴다는데, 그때라도 검진을 했더라면 병마를 떨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인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너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이기에 지인들은 하루빨리 병마를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김태정 시인 대표시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게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이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물푸레나무 전문」

김태정 시인은

유독 소녀 같은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았던 시인이라고 한다. 또한 남에게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용돈이라도 주려고 하면 갖은 핑계거리를 만들어야만 했다고 금강스님은 회고한다. 보일러 기름 넣을 돈도 없이 평생 가난과 함께 해야 했던 순수한 영혼의 김태정 시인에 대해 이원규 시인은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에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라고 했다.

김태정 시인은 91년 문예지 <사상문예운동>에 우수(雨水) 외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작품집으로 전래 동화집 <자루 속에 빠진 꼬마 제롬>이 있다. 등단 13년만인 2004년에 시인의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김남주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재직 시절 간사를 맡으면서 문예운동에 활발하게 관여해 왔다.

2003년 미황사와 인연을 맺어 미황사에서 1년을 기거한 후 절 아랫마을인 장춘리와 신기리를 생활했다. 몸이 안좋아지면서 보다 안정적인 공간인 송지면 치소리로 이사했다. 그의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은 신기리에 거주할 때 출간됐다.

올해 초 3개월 시한부 삶의 암판정을 받은 시인은 혼자 송지면 치소리에서 생활해 왔으며 7월 6일 해남종합병원에 입원해 병마와 싸우고 있다. 유방암으로 시작된 암은 폐암과 골수암으로 진행된 상태이다. 자존심과 인내심 그리고 삶의 의지가 그나마 시인을 지탱해 오는 힘이다.

시인의 유일한 가족으로는 현재 서울에 오빠가 생존해 있다. 많은 문우들과 지인들이 그녀의 병을 아파하며 빠른 쾌유를 빌고 있다.

박태정 기자/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26)

땅끝 해남의 시인들…김남주·고정희 그리고 김태정

이원규 | 시인

ㆍ‘세상변혁 열정’ 불살랐던 김남주·고정희 선생이 그리운 날들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걸어서 못 가면 모터사이클을 타고서라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며 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환멸을 넘어, 연민을 넘어 바람의 끝에서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날마다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의 자세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모두 헛꿈이었으며 언제나 제자리였다. 얼마만큼 왔나 돌아보면 그 자리 그대로였다. 멀리 지리산까지 빈손으로 와 14년 동안 살아봤지만 돌이켜보면 목줄 매인 흑염소처럼 매애 매애애 울며 산기슭을 뱅뱅 돌기만 했다. 이따금 밧줄이 고무줄처럼 조금 늘어졌다 줄어들었을 뿐 환멸과 권태는 그대로이고, 지극한 연민의 마을 초입에도 가보지 못했다. 애당초 그릇이 작아서인지, 열망의 절대부족 때문인지, 매사에 인내심으로 포장한 우유부단함 때문인지, 날마다 참회가 모자라는 후안무치의 맨얼굴로 차마 거울을 바로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그마저 한 발 한 발 내디딘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바람에 등 떠밀린 것이다.

막 돌을 지난 아이가 겨우 한 걸음 내딛다가 넘어지듯이 다시 걸음마를 배워야 할 때가 왔음을 절감한다. 이미 몸도 마음도 많이 늦었다는 것도 확연히 알겠다. 백척간두진일보는 그 얼마나 오랫동안 써먹어온 사치였던가. 다만 내가 찍어야 할 발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만이라도 마치 일생일대의 인감도장처럼 하나둘 찍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리하여 세상의 끝은 엄두도 못 내고 대신 전남 해남군 땅끝에 가보았다. 북위 34도17분38초, 동경 126도6분01초인 땅끝(土末)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북위 43도0분39초)과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그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루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는 것도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다시 서울에서 함북 온성군 유원진까지 2000리여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볼 수는 있지만 한반도 북쪽 끝인 유원진에 가보는 것은 극한의 남북대결 속에서 꿈조차 꾸기 어렵다. 현실정치는 통일의 꿈은 고사하고 ‘가고 싶다’는 상상력까지 제한하는 것이다.

그나마 땅끝 해남에는 언제라도 가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땅끝은 말 그대로 내륙의 마지막이 아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니 사실은 언제나 세상의 처음이 되는 곳이자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는 곳이다. ‘역주행의 시절’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시인 김남주·고정희 선생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 아래 아주 작은 마을의 한 농가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권정생 선생 이후의 가장 맑은 영혼’ 김태정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시인’이자 ‘전사’였던 김남주(金南柱 1946~94) 선생의 생가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으며, ‘여성운동가’ 고정희(高靜熙 1948~91) 시인의 생가는 삼산면 송정리에 있다. 두 살 차이인 그들의 고향은 논밭을 가로지르면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80년대 민주화투쟁에 있어서 아직 젊은 ‘문단의 거목’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두 시인의 큰 발자취는 새삼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전사’ 혹은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김남주·고정희 시인의 품성은 사실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나는 문단의 막내로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의 총무간사로 한동안 일했다. 그때 만난 김남주 시인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큰형님’ 같았으며, 고정희 시인 또한 언제나 자상하고도 부드러운 ‘누님’ 같았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니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게 마땅했으나 참으로 불손하게도 나를 비롯한 젊은 문사들이 ‘형님’ 혹은 ‘누님’으로 불러야 할 정도로 그 품이 넉넉했던 것이다.

송정리에 있는 고정희 시인의 생가 | 이원규 시인 촬영

김남주 선생은 79년 ‘남민전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88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9년3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94년 2월13일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감옥 밖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투병생활까지 겹쳐 실제로는 자유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후배문인들과 생맥주집 등에서 밤을 새우며 노래를 부르고 ‘대중적 무기로서의 시’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김남주·고정희 시인 이후에 그 누가 있어 ‘세상 변혁의 열정’을 되살리고 있으며 또 그 누가 있어 ‘시로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문단은 내내 지리멸렬했으며, 어느 중견소설가의 지적처럼 “만약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문단이 지금처럼 이렇게 나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선생의 모습이 바로 엊그제처럼 환하기만 한데 어느새 고정희 시인은 20주기, 김남주 시인은 17주기가 되었다. 이 쓸쓸한 봄날에 봉학마을과 송정마을을 둘러보며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21년 전 초여름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길사인가 어디에서 행사를 마치고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 간 적이 있다. 함께하던 많은 무리가 자리를 뜨고 김남주·고정희 시인과 더불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자인 오현숙 간사와 나 그렇게만 남았었다.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고정희 시인은 바로 다음날 필리핀으로 1년 동안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늦은 시간 밤비 소리에 센티멘털해진 것일까. 먼저 김남주 시인이 노래를 불렀다.

특유의 저음과 바이브레이션이 감동의 울림을 주는 목소리로 그의 애창곡인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불렀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중략)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1절의 가사에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올렸는지 노래를 부르는 김남주 시인이나 먼 길 떠나야 하는 고정희 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특히 3절까지 다 부르는 동안 2절의 가사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버린 고향이길래’는 묘한 울림을 주는 부분이었다. 잘은 몰라도 고향이 지척인 두 선생의 남모르는 흠모의 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인근 송지면 미황사 아래 김태정 시인의 집. | 이원규 시인 촬영

마침내 고 시인이 답가를 하고, 다시 김 시인이 답가를 하는 등 무려 30여 곡은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와 노래가 모두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냥 답가가 아니라 화답이었던 것이다. 오래 듣다보니 그제야 오랜 세월 동안 차마 말과 행동으로 하지 못한 내밀한 고백들을 노래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간사와 나는 자리를 피해줄 마음도 내지 못한 채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다. 새벽 빗소리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신적인 사랑의 진수를 엿본 셈이었다.

그렇게 새벽에 헤어진 뒤 필리핀을 다녀온 고정희 시인은 91년 6월9일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해 유명을 달리하고, 김남주 시인은 끝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94년 2월13일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나이 겨우 43세, 48세였으니 치열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짧은 생이었다.

그런데 김남주·고정희 생가가 있는 삼산면 바로 인근의 송지면 미황사 아래 ‘순수’ 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고정희 시인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김태정 시인(48)이다.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두 번째 시집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다.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지리산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과 7년 전에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다. 그런데 아마 ‘죄의 총량’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김태정 시인이 좀 더 가벼울 것이다. 나 또한 지리산에 살며 ‘자발적 가난’ 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아무래도 이들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민중서정시인 김태정, 먼 길 떠나다

6일 암으로 이 세상 떠나... 해남 제일장례식장 발인 9월 8일

이종찬 글꾼(lsr21@naver.com)



물에 담근 가지가
그물, 파라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며 잔잔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물푸레나무’ 모두

지난 2004년 한국문단에 나온지 13년 만에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펴낸 뒤 “시(詩)만 빼고 모두 버렸어요”라고 말하던 처녀시인 김태정. 문단에서 또 하나 ‘고정희(1948~1991) 시인별’이라 불리던 그. 아, 그가 6일 이 세상을 버렸다. 이 세상이 그를 버린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이 세상을 버렸다.

나이 고작 마흔여덟에, 참으로 얄궂게도 고정희 시인 고향인 해남에서 말이다. 그는 첫 시집이 나오던 그해인 2004년에 땅끝마을이었던 전남 해남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시골마을로 몸과 마음을 몽땅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TV도 없이 라디오를 살가운 벗으로 삼아 작은 마당에 반찬거리인 채소를 일구며 시를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행복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시집도 내지 못하고 덜컥 ‘암’에 걸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그 길로 떠나버렸으니, 아 참으로 안타깝다. 김태정 시인! 착한 그대,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시게나. 그대가 남긴 시들이 있잖은가. 그 시들이 그대 실루엣이자 거듭남 아니겠는가.

“시는 저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

“마흔 해가 넘도록 깃들여 살아온 서울을 떠나 해남에 내려오기까지 스스로를 내몰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정 많은 사람들의 푸근한 심성 때문이리라. 뒤늦게 묶어내는 시집이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눌 즐거움이 있다면 이곳 ‘정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첫 시집 ‘시인의 말’

그는 지난 2004년 7월 끝자락, 13년 만에 낸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을 들고 “어차피 평생 시를 쓸 거니까요, 시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요”라며 “시는 저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다. 이는 곧 그가 삶에서 시를 건지는 게 아니라 그가 쓰는 시에서 삶을 건진다는 뜻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을 잠깐 들춰보자. “개당 50원짜리 실밥 따기에 코피를 쏟으며”(시의 힘 욕의 힘) “학비벌이 부업으로 야간대학을 다녔고”(까치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색인 교정 아르바이트 일당 4만 원으로 장만한 286컴퓨터로 시를 쓴다”(나의 아나키스트). 그에게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궁핍이 나로 하여)r를 마련해주는 것은 그림동화에 글을 쓰는 일뿐이었다.

오늘은 조카가 선물해준 샤프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굵고 뭉툭한 연필심에 비하면
이 가늘고 날카로운 0.5밀리 샤프심은
가볍고 세련된 샤프의 자존심을 증거한다
아무리 정교한 세밀화라 해도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샤프심은
가끔 내 삶의 미세한 신경회로를 건드리지만
그 정도 사소한 경박성쯤은
애교로 봐줄 아량도 과시하면서
뒤꼭지만 눌러주면 무한정 심이 나오는
그의 놀라운 생산력은
몽당연필도 아쉬웠던 나의 어린시절을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샤프로 시를 쓰는 오늘만큼
내 손아귀에서 내 어깨에서 내 삶에서
짐짓 무게를 덜어내고자 한다
 -‘샤프로 쓰는 시’ 몇 토막

김태정 시들은 “순정해서 말갛고 깊다”

김태정 시인보다 한 살 많은 이원규 시인(49)은 ‘땅끝 해남의 시인들’이란 글에서 “김남주·고정희 생가가 있는 삼산면 바로 인근의 송지면 미황사 아래 ‘순수’ 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라며 그가 바로 “고정희 시인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김태정 시인(48)”이라고 적었다.

그는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두 번째 시집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라며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7년 전에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다. 나 또한 지리산에 살며 ‘자발적 가난’ 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썼다.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아무래도 이들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이원규

시인 정우영은 김태정이 쓴 시들을 ‘민중서정시’라 이름 붙였다. “80년대의 억센 민중시가 구현하지 못한” 소담한 일상을 그린 김태정의 시들은 “순정해서 말갛고 깊”기 때문이다. 그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묶은 그는 35도까지 치솟는 찜통더위에도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여민 채 나타났다”며 “그의 시가 그 모습 위에 겹쳐졌다”고 되짚었다.

시인 김이하(52)는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시인 김태정이 죽었다. 오늘 아침에 문자를 받았다. 너무나 안타깝다”라며 “죽기 전에 한번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눈을 감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퍼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모두

고 김태정 시인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시 ‘우수’ 등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인 2004년 7월 끝자락에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해남 달마산 미황사 아래 한 농가에서 살다가 지난 해 끝자락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다 9월 6일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은 해남 제일장례식장이며, 발인은 9월 8일이다. 연락처 061)537-4447

이종찬 글꾼(lsr21@naver.com)




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안상학

그의 마지막 계절은 어땠을까
뿌리 뽑아 씻어들고 서울 떠나 해남으로 간
물푸레나무 한 그루 처녀
여린 가지 곱게 빗어 넘기고
치맛단 잡고 개울 건너듯 뿌리 여며 쥐고
미황사 그늘 속 깊은 자궁으로 돌아간 물푸레나무
태어날 때 아픔은 어미 것이지만
돌아갈 때 아픔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어서
뼛속 깊이까지 통점을 키운 물푸레나무
꽃이 피어도 몸이 아팠네
바람만 불어도 몸이 아팠네
낙엽이 지거나 눈이 내려도 몸이 아팠네
통점을 사랑해서 한 잎씩 따서 물었네
통점을 사랑해서 한 뿌리씩 베어 물었네
아플 때마다 용케도 마음이 나았네
꽃이 피어 아파서 마음이 나았네
바람 불어 아파서 마음이 나았네
낙엽 지고 눈이 내려 아파서 마음이 나았네
어느덧 그에게도 마지막 계절이 오고
아플 때마다 몸이 조금씩 사라지고 마음이 나았네
마지막 계절이 소진 됐을 때
태아처럼 웅크리고 작아지던 그도 소진되었네
물푸레나무 한 그루 처녀
물푸레나무 한 꽃의 아이
물푸레나무 한 잎의 태아
최선을 다해 사라져갔네

2011. 9. 6. 故 김태정 시인을 생각하며 안동에서 안상학 절 올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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