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8-08-02 13:56
절집이야기 6 - 차나 한잔 하시게
 글쓴이 : 금강
조회 : 3,389  

차나 한 잔 하시게

2000년 봄이었다.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해제를 하고 미황사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난 아침이었다. 아랫마을 사는 노보살님이 밥을 해주러 올라와서는

“오메 시님 오셨소! 그나저나 스님 축하 하요.”

한다.

“축하는 무슨 축하요?”

궁금해서 물으니 주지 현공 스님이 어제 떠나면서

“인자 금강 스님 보고 주지스님이라 하시오 했당께요.”

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아득해졌다.

지난 겨울 선방에서 유달리 공부가 잘 되어 이왕 시작한 공부 뿌리를 뽑으리라 마음 먹은 참이었다. 내친 김에 옷가지 몇 개 챙겨 떠나려고 들른 길인데 발목이 잡힌 꼴이 되었다.

그때부터 망연히 세심당 차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주지를 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이렇게 지극한 마음이 일어나 공부를 한단 말인가. 주지를 맡는다는 건 이 번 생에는 지극한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10년 동안 걸망 풀어 놓고 자유롭게 다녔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지를 맡긴 맡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렇게 등 떠밀리듯 주지가 되었다. 혼자 차를 마시면 주지가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아 보여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차나 한 잔 하십시다.”

하며 붙들고 차를 마셨다.

미황사는 제법 알려진 곳이어서 가족이 함께 구경하러 오거나 떼를 지어 온 답사객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미황사에 와서 차를 마시고 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미황사에 가면 주지스님이 공짜로 차를 주고, 인생 상담도 해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입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어느 날 방문을 여니 마루에 즐비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 맛을 보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날마다 아침 9시부터 마시는 차가 오후 6시가 되어야 끝이 나곤 했다.

몸이 차로 가득한 것 같아 바늘로 손끝을 찔러보면 푸른 찻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을 정도로 차를 마셨다.

그렇게 미황사 차 맛을 본 사람들이 늘어갔다. 미황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원인이기도 했다.

절을 둘러보러 온 사람들에게 절은 언제나 낯선 공간이다. 그러면서도 호기심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절에선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그들이 미황사에서 손님이 되어 만화경 속 같은 경내의 한 켠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미황사를 좋아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절에 오는 사람들 누구든 차별 없이 차를 나누어준 덕분에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었고 사람들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차는 나와 사람들 사이에 길을 놓아준 징검다리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차가 없으면 아주 심심할 것 같다. 말을 조리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수행 내용도 변변찮은데 차만 있으면 누구든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맑은 차 한 으로 그저 족하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차만 마신다. 가장 신선하고, 맛과 향이 은은하다.

차를 마셔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절에서 스님들이 주어서 처음 먹어 보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첫 경험이 될 수 있는 나와의 차담 시간을 허투루 할 수가 없다. 좋은 우리 차를 대접하는 이유이다. 처음 맛을 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 이후의 모든 기준은 첫 번째 경험으로 평가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한문학당이나 집중수행인 참사람의 향기를 진행 할 때에는 항상 차담시간을 1시간을 넣는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차를 달여 마실 수 있도록 하기위한 교육이다.

실제로 한문학당을 졸업하는 날 부모님을 보자마자

“엄마 다구 구입해서 차 마시자.”

조르는 녀석들을 보기도 한다. 차담시간을 할애한 효과가 곧바로 나오는 걸 볼 때면 혼자서 비긋이 웃곤 한다.

절에는 늘 직접 차를 달일 수 있도록 다구를 여러 벌 준비 해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차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색과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방법과 다구들의 명칭과 차를 맛있게 달이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는 4,500년 전 중국의 염제 신농씨가 72가지 중독증상을 차로 해독하면서 차의 효능을 발견한 이야기 등 차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뒤에는 차는 잠을 적게 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장 필수적인 음료라는 이야기며 갖가지 차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세계인의 차 문화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들려준다. 중국인들은 향을 좋아해서 발효시켜서 만들고, 일본인들은 색을 좋아해서 증기에다 찌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맛을 좋아해서 솥에 덖어서 만든다. 그리고 유럽 사람들은 차에 레몬즙이나 설탕, 위스키를 첨가해서 즐긴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곤 한다.

요즘 시대에 차는 아무래도 스님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스님들과 차에 얽힌 이야기나 내가 수행자로 살면서 겪었던 이야기도 좋은 차담거리가 되어 준다. 그리고 일지암에 사셨던 초의 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선생 사이에 오간 아름다운 이야기며 동다송도 차 맛을 돋궈주는 소재가 된다. 차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야기를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차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했다. 물 기운은 올려주고, 불기운은 내려준다는 말이다. 머리를 맑게 하는데 좋다는 이야기이다. 스님들이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 귀, 코, 혀, 뇌 등의 다섯 가지 의식작용을 하는 곳이 머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머리에 항상 열이 생겨나는데 머리에 열을 내려주는 것으로는 차와 절[拜]과 잠이 최고의 묘약이다.

또 차는 사람들과 만나는 소통의 도구이면서 자신에게는 휴식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차담은 나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필요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바쁘다는 핑계는 잠시 접어두고 맛과 향과 색이 맞춤하게 우러난 찻잔을 들자.

“자, 차나 한 잔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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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희 08-09-21 09:27
답변 삭제  
스님 글을 읽다보니, 차의 빛깔처럼 맑았던 스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도 절집 다실에서 차를 마신건 미황사가 처음이었요.
그 순간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거리가 멀어 뵙진 못하지만 내년즘엔
자원봉사하러 가야지 하고 있답니다.
길게요..^^
 ' 차 한잔 하고 싶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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