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8-09-10 00:14
노을과 추석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410  

노을과 추석

9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 같다. 이제 살 것 같다. 워낙 8월까지 바쁘게 지낸 터라 지나온 시간이 먼 이야기 속의 일처럼 아득하다. 시골 조그마한 절에 서 두 달 동안 날마다 100 여명이 넘는 대중들과 지내며 전쟁을 치르듯 살았다. 한문학당이나 참선수행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진행하는 버거운 나날이다 보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롭게 찾아온 9월이 반갑다. 게으름을 좀 부려도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 같다.

이렇게 가을이 찾아오면 내가 즐겨하는 일과가 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만하당(노을 가득한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마냥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날마다 서쪽으로 지는 해이지만 초가을 날씨와 만나면 그 색이 참으로 곱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과 구름이 만나서 살아있는 산수화 속 풍경을 만들어낸다. 구름 형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천변만화의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을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까지는 약 1시간. 해거름 녘 그 한 시간 동안 묵연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 저편부터 하나 둘 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진도의 바닷가 마을에도, 작은 섬 상마도에도, 아랫마을 서정리에도 별빛들이 반짝인다.

미황사가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앞을 가로막는 게 없어 시야는 거칠게 없다. 위로도 아래로도 별빛뿐이다.

허공중에 떠있는 뭇 행성들이 우주를 밝히는 별이듯 마을 가운데 불빛을 내걸고 빛을 내는 저 집들도 모두 다 별이다. 그 집에 깃들어 사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머물렀으되 머무는 바 없이 각각의 빛을 발하며 움직이는 별, 살아있는 별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다 떨어 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선사는 말 했다.

“몸체가 가을 바람에 다 드러났느니라.”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감추어져있던 나무의 가지들을 볼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선구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드러나 있다. 거짓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내 입장 속에서 무엇을 보려하지 않든가. 그것이 상(相)이고 그 상을 가을 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듯 내다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이다.

대개 9월에 추석이 있다. 가을의 햇곡식과 햇과일들로 인한 풍성한 결실을 생각하면 뿌듯한 때이다. 하지만 초가을에 느끼는 한가함과 쓸쓸함은 내가 사는 곳이 절이기 때문일 듯하다.

추석날 아침 절집 마당은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쓸쓸하다. 하지만 그 빈 마당을 비집고 찾아든 따사로운 햇살 덕분에 쓸쓸함은 이내 한가함으로 바뀐다.

시골 절의 설날은 한 해의 시작을 절에서 맞이하려는 신도들로 부산하다. 반면 추석 풍경은 좀 다르다.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내려온 자식들과 집에서 오붓하게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절은 그야말로 텅빈 절간이 되고 만다.

게다가 절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대부분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추석날 절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는다.

물론 절에서도 송편을 만들고 차례도 지낸다. 몇 해 전부터는 외국인들이 추석날 많이 찾아온다. 추석날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보니 이방인에게는 명절 날이 오히려 쓸쓸한 모양이다. 추석 연휴를 조용하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찾아낸 곳이 절일 터이다.

절을 찾아 추석을 지내는 이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추석 템플스테이다. 추석 전날 밤에는 송편을 빚으며 두런두런 차담을 나누고, 추석 날 아침이 되면 솔잎을 뜯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부도전까지 산책을 가는 소박한 프로그램이다.

절에서도 일반 가정처럼 추석날 차례를 지낸다.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고 조촐하게 영단에 상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조상에 제를 올리는 풍습은 늘 내가 나 혼자만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공부이다. '나'를 있게 하는 요소들이 무수하게 많음을 깨닫도록 해주는 시간이다.

수행의 길에서 가장 마음에 짐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부모님에 대한 부채의식이다. 다른 인연들은 연락하지 않아도 서운하면 그뿐인데 출가자에게도 부모에 대한 마음은 여여하지가 못하다.

얼마 전에 무등산 석불암이라는 산꼭대기 암자에서 19년째 살고 계시는 선배스님 한 분을 만났다. 좋은 것을 보면 나누어 가질 누군가 떠오르고, 환희심 나는 공부를 하다보면 동행 자를 만들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나누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 스님은 공부하다가 문득 '어머니 한분 구하지 못하고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란 생각에 구름처럼 자유로운 선객의 길을 접고 어머니와 18여년을 공부하였느데 지난 8년간은 거동도 못한 채로 누운 어머니와 공부를 하였단다. 선배 스님 어머니 이야기인데 내 어머니 의 이야기인 듯 눈물이 나왔다.

우리 절 대웅전 뒤편 산자락을 돌면 소림굴이라는 조그마한 토굴이 있다. 20여년을 많은 스님들이 공부하며 지나간 곳인데 토굴에서 살게 된 스님이 잠시 세상으로 나갔다 오겠다는 의 것이다. 20년 전 출가할 때 부모님 가슴에 박아놓은 대못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부모님이 임종을 앞두었다는 연락을 받자 나가서 지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죄를 닦듯 마지막 시봉을 하며 임종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부모를 향한 마음, 부모가 자식을 향하는 마음에 경중의 무게가 세간과 출세간 사이에 따로 있겠는가.

이번 추석의 차례에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 중에서 먼저 가신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차 한 잔 올려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깊은 다짐도 한 번 해보리라. ‘늘 가까운 곳부터 살피며 수행 하겠습니다.’ 하고 말이다.

이 번 추석엔 훤히 비추는 보름달을 꽃등삼아 달마산에 올라보리라. 산 아래 펼쳐진 바다와 들과 강을 굽어보며 거기 깃든 모든 별들의 생명을 위해 달맞이를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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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ther 08-09-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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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글 입니다.
epoche 18-07-02 17:13
답변 삭제  
노을과 추석이 왠지 닮았군요..

아주 낯선 것들이 이 글에서는 이토록 닮았습니다.

만하당에서 보는 바다노을은 늘 평화로울 것 같아요.

산 위에 걸린 노을은 솔잎에 찔려 아프거든요.
그래서 더 벌겋게 멍이 드나 봅니다.

노을이 안식으로 풍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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