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8-17 20:31
설날풍경
 글쓴이 : 금강
조회 : 3,917  

설날 풍경

다른 지역과 다르게 미황사 주변의 사람들은 설 차례 상을 섣달 그믐에 차린다. 설 전에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을 대목장이라 하는데 이때 부처님께 올릴 향과 초, 과일을 함께 준비를 한다. 석작이라는 대로 만든 바구니에 쌀과 과일, 초와 향을 담아서 그믐날 차례를 지내자마자 절로 향한다. 여느 지방과 달리 설 전날 차례를 서둘러 지내고 절에 와 설날을 맞이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닷가 마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바닷가라는 지역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이라 여러모로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새해 첫 새벽에 부처님께 나아가 불공을 드려야 새해에 부정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더 강하게 작용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설날 차례 지내는 것은 어찌하고 모두 절로 다 모이는 거요?”

“아따 스님은 새로 와서 잘 모르는 구만요. 여그는 설 차례는 그믐날 지내고, 설날은 부처 님께 불공 올리고 절에서 떡국을 먹지라잉.”

미황사에 짐을 푼 첫 해 설날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빙그레 웃음부터 나온다.

도시에서 설날 맞이하기 위해 집을 찾은 자식들을 뒤로 하고, 찬물에 목욕하고는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섣달 그믐날 이 십 여리 추운 밤길을 걸어서 줄지어 찾아오는 신도들의 정성에 가슴 뭉클했던 그때의 감동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그들은 새해 첫 날을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기 위해 여러 날 전부터 갖가지 정성을 들인 사람들이었다. 부부는 방을 따로 쓰고, 옆집에 아이를 낳아도 부정 탄다하여 가지 않고, 절에 오는 길에 말도 삼간 채, 무거운 짐일망정 땅에 내려놓는 일 없이 부처님 전까지 찾아온 신심 깊은 신도들이었다.

설날 새벽 도량석을 하기위해 대웅전에 들어가면 이미 발 딛을 틈도 없이 법당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부처님 앞에는 공양그릇이란 그릇들은 모두 나와 쌀과 과일들로 넘쳐난다. 향로에는 사람 수 만큼 피워놓은 향이 법당 가득 메케한 연기를 피워댄다.

“과일은 이 그릇에 함께 모아서 부처님께 올리고요, 공양미도 이 큰 그릇에 함께 모아서 보기 좋게 올리고, 향이나 초가 켜져 있으면 따로 피우지 마시고 그냥 가져오신 공양물만 불단에 올리세요.”

목소리를 높여 몇 번씩 신신당부 해보지만 그뿐이다. 신도들은 죽어라 주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지금껏 해오던 제 깜냥대로 할 뿐이다. 부처님을 향하는 간절한 염원이겠거니 하고 내 쪽에서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새벽예불과 기도를 마치고는 마주보고 서로 세배를 한다.

“새해에는 여러분 가정과 이 고장과 나라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밝고, 아름답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절에 도착하자마자 불공을 마친 것입니다. 농사짓고 나서 따로 부처님께 올릴 쌀을 마련하고, 공양물을 준비해서 깨끗한 마음으로 찾아온 그 마음이 참된 불공입니다. 부처님을 찾아오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세상에서 더 없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한 해 동안 자신과 가족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법문과 함께 신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축원을 한다. 처음엔 하루에 불공을 열 번 정도 했다. 신도들의 행렬이 이어질 때마다 불공을 드렸던 것인데 설득하고 설득하여 새벽예불, 오전 7시 그리고 10시 이렇게 세 차례로 나누어 진행하게 되었다.

“시님, 교회 댕기는 아들 며느리는 축원장에서 빼주란 말이요. 하느님 믿것다는디 내가 뭔 수로 말리것소.”

“우리 아들이 아들을 낳았은께 축원장에 새로 이름 올려 주씨요.”

“우리 영감이 지난 가실에 돌아가셨단 말이오. 축원장에서 빼고 영가로 올려 주씨요.”

신도들은 축원장을 찾으러 와 각가지 사연을 털어놓는다.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돌아가신 영감님 이야기에 눈가를 훔치는 보살님께는 연락 했으면 염불이라도 드리러 갔을 텐데

하고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새해 첫날부터 정신없이 하루를 지내고나면 어느새 밤이 찾아온다. 이때가 되어야 하루를 바쁘게 지낸 절 대중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윷놀이를 핑계로 스님들과 식구들이 서로 세배를 한다.

이 날은 내가 일 년 동안 착실하게 모은 선물들을 푸는 날이다. 누가 언제 선물을 했는지, 사용방법은 어떤지, 마치 쇼핑몰 선전하듯이 하고 나면 함께 모인 대중들은 배꼽을 잡으며 즐거워한다. 가끔 토굴에 사시는 스님들이 오래된 백팔염주나 소중한 책을 내어 놓을 때는 대중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요즘에는 설날 윷놀이가 소문이 나서 인근의 신도 가족들이 오기도하고, 멀리서 템플스테이로 참가하기도하여 꽤 많은 대중들이 윷놀이에 참가한다.

팀을 구성한 뒤 윷놀이를 하여 등수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등수가 높은 팀부터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처음부터 자기가 갖고 싶었던 것들을 다 가져가서 만족을 한다는 것이다.

땅끝 마을 미황사에서 맞이한 설날은 내게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새해 첫날부터 온갖 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의 모습은 그 어떤 광경보다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모습 중에서 쭉정이는 다 버리고 고갱이만 남겨 놓은 모습처럼 참 아름다운 풍경을 나는 설날 보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땅끝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켜주고 싶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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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여우 09-10-26 10:52
답변 삭제  
스님께서 미황사에 머물도록 하시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분들께 정말 감사드려야겠네요.
그 덕분에 스님과 미황사를 만나
제가 더 행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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